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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1년간의 세계일주", 내가 바라본 지구촌 6대륙


                                                             

아시아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 범주를 넓히면 동북아시아인, 더 확장하면 아시아인이 됩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테지요.

낯 뜨거운 고백이지만 여행 전 저는 스스로가 뿌리박고 사는 아시아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아시아 문화가 다 거기서 거기지’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다른 대륙을 동경하곤 했습니다. 문화사대주의 혹은 옥시덴탈리즘에 빠져 내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6개 대륙을 여행하고 난 후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아시아는 참 다채로운 문화를 지녔습니다. 동서로 유교∙불교∙힌두교∙이슬람교의 족적을 훑다보면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옵니다. 찬란했던 문화의 유적은 물론이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신적 가치들이 풍성합니다.

네팔의 히말라야에서,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시리아의 모래사막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저는 아시아의 진면목에 눈을 뜹니다.

                                                                           <중국 만리장성>

남아메리카

여행이 끝나고 나니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어디가 가장 좋던가요?”

질문 앞에서 늘 망설입니다. 100곳의 여행지엔 100가지 색깔이 있다죠. 한낱 여행자의 시선에 가둬 우열을 가릴 만큼 세상은 단조롭지 않습니다. 화제를 돌려 슬쩍 넘어가 보지만 집요하게 추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숙고 끝에 저는 ‘남미’를 택합니다.

마야∙아스텍에서 잉카로 이어지는 고대문명은 남미의 백미입니다. 페루의 ‘마추픽추’,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아르헨티나∙브라질의 ‘이과수 폭포’, 파타고니아의 ‘모레노 빙하’ 등 남미에는 자연이 빚은 역작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 남미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람’때문입니다. 남미 사람들은 정말 열정적입니다.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제 속에만 담아두기 힘든 탓일까요? 그들의 열정은 늘 밖을 향합니다. 그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그 열정에 ‘감염’돼 덩달아 신이 납니다.

 


                                                                      <볼리비아 소금사막>

북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맹주는 역시 미국입니다. 사실 한 대륙의 실세로만 묶어 두기에 이 나라의 존재감은 버거우리만큼 큽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란 수식어가 적합하겠죠.

이 거대한 나라를 여행하는 내내 저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 어지러움의 실체는 다름 아닌 ‘모순’이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늘 자랑스러워하는 자본주의, 지유민주주의, 인권 등 보편적가치의 모순입니다.

연중 불야성을 이루는 라스베이거스, 세계금융의 심장부 뉴욕, 그리고 디즈니랜드∙유니버셜스튜디오 등 ‘유희산업’의 끝을 보여주는 로스엔젤리스…, 역시 미국은 자본주의의 상징입니다. 반면 화려한 네온 뒤편에 어김없이 수많은 부랑자와 노숙자가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함께 ‘유령도시’로 변한 디트로이트에선 자본의 잔인함을 목격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떤가요? 9∙11의 참상을 드러낸 ‘그라운드제로’에서, 이라크 전쟁의 전사자를 추모하던 보스턴 ‘자유의 길’에서 저는 미국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이 가치가 때로는 불순한 의도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낍니다.

                                                                                      <뉴욕 맨하튼>

                                                          <보스톤 이라크전 희생자 묘역>


유럽
유럽에 발을 딛기도 전에 저는 이미 지구촌 곳곳에서 ‘유럽스러움’을 한껏 경험했습니다.

과거 제국주의의 망령이 세계를 옥죄던 때 유럽은 전 대륙을 ‘자기복제’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동서로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은 오죽하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을까요. 지금도 홍콩과 인도,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영국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남미 모든 나라는 언어부터 문화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쌍생아와 다름없습니다. 남아프리카에는 독일어 간판이 즐비합니다.

유럽 패권주의는 하나같이 원주민을 억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말살했습니다. 폭정이 할퀴고 간 자리엔 강자의 ‘무자비’와 약자의 ‘신음’만 덩그렇습니다.

반감 탓인지 유럽 여행을 하는 내내 제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제 글에서 ‘유럽의 낭만’을 찾기 힘든 까닭입니다.

                                                                  <그리스 아테네>



아프리카
 “세계일주? 그럼 아프리카도 다녀 온 거야?”

한국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묻습니다. 다른 대륙은 그러려니 하나봅니다. 꼭 아프리카만 따로 떼어 이리 확인하려 듭니다. 사람들이 검은 대륙을 ‘미지의 땅’으로 여긴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아, 프, 리, 카”, 이 넉자를 되 내일 때면 서로 다른 감정이 솟아납니다.

오랜 식민지로 말미암아 ‘홀로서기’가 서툰 검은 대륙은 기아와 질병, 내전까지 더해져 지구촌에서 발전 속도가 가장 더딥니다. 문명과 거리를 둔만큼 소심한 여행자에게 이곳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반면 수 천 종의 동식물이 천연 그대로 보존된 생태계, 디지털 세상 속 아날로그 삶을 사는 아프리카 원주민 등 오직 아프리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인류∙생태학의 가치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듯 벅차오릅니다.

미지의 대륙을 향한 이 상반된 감정은 묘한 설렘을 불러일으킵니다.

                                                             <남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막>

오세아니아
태평양 남쪽에 오도카니 자리한 섬나라 호주와 뉴질랜드. 이들을 포함한 오세아니아 대륙을 이야기할 때 자연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호주에서는 자동차로 종단을 했습니다. 멜버른을 출발해 캔버라, 시드니, 골드코스트를 거쳐 브리즈번에 이르는 동안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앞에 절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밤중 원시림을 달리다 한편에 차를 세운 채 쏟아지던 별무리를 올려다보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청정국가인 뉴질랜드가 품은 자연은 좀 더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을 줍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서 한가로이 풀 뜯는 양 떼를 보고 있자면 ‘디지털 놀음’에 지친 마음이 절로 치유되는 것 같습니다.

오세아니아 여행은 다채로운 자연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호주 도로를 달리다 ‘로드 킬’의 참상을 목격, 개발만능주의의 폐해를 되새깁니다, 호주 사회에 자리 잡은 한인들을 통해 대한민국 청년의 현주소를 가늠하고 이를 통해 자기성찰과 반성을 해봅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문화의 다양성이 얼마나 소중한지 상기시켜 줍니다.

                                           <뉴질랜드 로토루아의 마오리족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