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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

야생사자를 보니 인간의 욕심이 부끄러웠다 녀석은 용의주도하다. 수풀에 바짝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는다. 바람결에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지 어쩌다 코를 킁킁거릴 뿐이다. 우리 역시 신중하긴 마찬가지. 녀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차량 옆 창문에 붙은 마흔 네 개의 눈동자는 깜박거림조차 잊은 채 한 곳을 향해 있다. 숨소리마저 죄악이다. 지독하게 고요하다. 30분째다. 아이 키 만 한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금수의 왕' 사자와 '영장류의 최상층부' 사람 간의 기 싸움이 팽팽하다. 전선은 2m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 형성돼 있다. 지구력이 관건이다. 녀석은 우리가 떠나길, 우리는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느 한 쪽은 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남부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동물서식지인 나미비아.. 더보기
8개국 청년들과 아프리카를 횡단하다 '마릴린 먼로', 멀리서 그녀가 다가온다. 이름에서 풍기는 요염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육중한 몸이 꽤 듬직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 차례 굉음과 함께 그녀가 멈춰 섰다. 마릴린은 우리를 오지로 이끌 캠핑차다. 안전과 직결된 주요 임무를 띤 만큼 구성원 모두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이름을 지어준 이유다. '트럭킹'을 통해 본격적으로 남부아프리카 나미비아 여행에 나섰다. 트럭킹(Trucking)이란, 트럭을 개조해 만든 캠핑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종·횡단하는 것을 뜻한다. 텐트 한 동에 의지해 잠을 자고, 직접 끼니를 지어먹는 야영생활이 어떨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수천 종의 동식물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보고, 문명을 등진 채 살아가는 원주민,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사막과 초원.. 더보기
만델라 이후에도 인종차별은 살아 있었다 "믹스! 너 공사장에서 백인 본 적 있냐?" "아니" "그럼 주차요원 중에는? 아님 청소부, 경비원, 구걸하는 사람…, 아무튼 3D 업종 중에서." "3D가 뭔데?" "Dirty, Difficult, Dangerous에 해당하는 험한 일을 뜻하잖아." "못 본 거 같은데." "그렇지? 죄다 흑인이지. 왜 그럴까?" "그야 흑인이 많으니까 그렇지. 남아공 인구의 80% 이상이 흑인이잖아. 신문사에서 일한 놈이 그것도 몰라?" "근데 왜 호텔이나 레스토랑 사장, 좋은 차 주인은 몽땅 백인이지? 네 말대로 흑인이 다수면 그 중에 잘사는 사람도 많아야 하잖아?" "유빈! 그게 뭐가 대수라고 발끈 하냐? 라디오 볼륨이나 높여봐. Bloody hell, bloody hell, blah blah…." 애초 기대하지 .. 더보기
피라미드 정상엔 바가지 상술이 있었다 여행기를 쓰다보면 종종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쓸 만한 글감이 없거나, 반대로 거리가 넘쳐날 때 그렇다. 기나긴 여정으로 여행 자체가 일상이 돼버린 상황에서 1년 365일 매일이 특별할 순 없다. 팔자 좋게 빈둥거리거나, 혹은 며칠 씩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처럼 딱히 한 일이 없는 경우 마땅한 글 소재를 찾기 힘들다. 머리를 쥐어 짜 본들 글 한 단락 쓰는데 하 세월이다. 반면, 글감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이 얘길 담자니 저 얘기가 아쉽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이래저래 닥치는 대로 쓰다보면 배는 어느새 산으로 간다. 글에 두서가 없다. 횡설수설한 글이 되기 십상이다. 이집트는 어떤가? 후자에 속한다. 쓸 내용이 너무 많다. 이집트를 대표하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수도 카이로 근교의 기자 지구에.. 더보기
시리아 여행에서 편견의 무서움을 알았다 편견은 잔인하다. 대상을 생각의 틀에 가둔 채, 멋대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자, 특히 언론처럼 공신력 있는 기관을 맹신할 경우 편견의 벽은 더욱 견고해 진다. 한 번 굳어진 편견은 좀체 무너지지 않는다. 마치 딱딱한 껍데기에 쌓인 견과류 같다. 그 외벽을 깨기 위해선 커다란 충격이 필요하다. '망치'로 호두 껍데기를 두드리듯, '경험'이란 공이로 힘차게 두드려야 한다. 돌이켜 보면, 시리아 여행은 내 머릿속 호두 껍데기를 부수는 과정이었다. '악의 축' 선입견으로 시작한 여행 현지인의 따뜻한 마음 몸으로 느껴 서구 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이를 여과 없이 전하는 국내언론에 익숙한 탓에 시리아 여행을 앞두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악의 축', '불량국가', '인권 사각 지대' 등.. 더보기
여행길에서 나의 편견과 이중잣대를 생각하다 오늘은 엽서를 띄웁니다. 문득 엽서가 쓰고 싶어졌어요. 카파도키아는 그런 곳입니다. 풍경 하나하나가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지난밤에 이스탄불에서 밤차를 탔습니다. 많이 피곤했는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잠이 들었죠.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먼발치서 동이 터 오릅니다. 비몽사몽간에 짐을 꾸려 내렸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변 풍경이 몹시도 생경합니다. 황량한 벌판에 기암석이 삐죽삐죽 솟아 있습니다. 사방이 모두 그렇습니다. 혹성에 온 기분입니다. 우주선 비유에스(BUS) 호는 소행성 카파도키아에 저만 덩그러니 남겨두고서 지구 은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통칭합니다. 제가 도착한 곳은 괴레메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먼 옛날 화산활동으로 이 지역에 셀 수 없.. 더보기
이스탄불은 문명충돌 위기 어떻게 극복했나 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할 때, 그 끝은 늘 참혹하다. 이긴 자는 사람이든 문화재든 진 자의 모든 것을 도륙한다. 힘의 균형이 기우는 순간 한쪽 문명은 폐허가 된다. 난무하는 살육과 파괴 속에 한 터럭의 자비도 없다. '승자독식', 지난 10개월의 여정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미,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등 대륙을 막론하고 이 명제는 비켜간 적이 없다. 인류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문명이 힘의 논리에 스러져 갔는가. 잔혹하기 그지없는 인간사의 궤적을 훑다보면 번번이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현기증이 인다. 그래서일까. 터키 이스탄불은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던 여러 문명의 어우러짐, 지배와 피지배의 간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승자의 관용, 2000년 고.. 더보기
유럽에 비해 한국청년들은 너무 착하다 그리스 여정을 코앞에 두고,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리스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단다. 지난해 말 경찰의 총격으로 15세 소년이 숨진 뒤 촉발된 청년들의 봉기가 해를 넘어 극렬한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있었다. 이미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피해를 톡톡히 본 터라 불안감이 싹텄다. 지난해 4월과 7월, 티베트와 인도 자이살메르에서 여행 계획이 어그러진 바 있다. 티베트는 중국 공안의 '문화학살'이, 자이살메르의 경우에는 폭탄테러가 원인이었다. 당시 이들 땅을 밟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이후 일정까지 차질을 빚는 바람에 새판을 짜느라 진땀 뺐던 것. '혹 이번에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터키와 중동, 아프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육로이동의 거점이 그리스다. 베이스캠프에 발을 딛지 못.. 더보기
단조로운 유럽보다 모로코의 혼잡함이 좋다 "어이! 후세인, 진짜 반갑다. 나 또 길을 잃었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시장 골목이 이쪽이던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안면을 튼 그다. 수년지기 대하 듯 호들갑을 떨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상관이랴. 거미줄처럼 복잡한 메디나 골목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을. 체면도 차릴 때와 버릴 때를 알아야 한다. 그의 싸늘한 시선에 아랑 곳 없이, 계속 친한 척을 했다. "꼬레아! 시장은 저쪽이라고. 나 지금 일해야 하니까 알아서 찾아." 손수레에 잡동사니를 늘어놓던 후세인이 퉁을 놓는다. 그럴 만도 하다. 두 시간 전, 미로 속을 헤매다가 행상하던 그에게 도움을 청했더랬다. 바쁜 와중에 그는 약도까지 그려가며 성의껏 길을 일러 주었다. 그런 호의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결국 나는 제자리로 .. 더보기
세계여행길에서 느낀 서양과 동양의 차이 나는 '길치'다. 초행길은 물론이고, 한두 번 다닌 곳에서도 헤맬 만큼 증상이 심각하다. 공간과 방향을 관장하는 우뇌반구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달음으로 목적지에 닿는 이들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존경심마저 든다. 여행 전 신문사에서 일할 때 항상 남보다 먼저 취재현장으로 향해야 했다. 길에서 허비할 시간을 고려해서다. 이러한 노력에도 자주 길을 잃고, 제 시간에 늦곤 했다. 먼저 도착해 취재기자를 기다리는 사진부 선배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세계일주 소식을 처음 접한 주변사람들의 걱정은 대단했다. 그들의 우려를 비웃으며 당차게 집을 떠났건만, 지난 9개월 동안 여기저기서 무던히도 헤매고 다녔다. 목적지 코앞에서 하염없이 방황하다가 택시를 잡아타는 일이 허다했다. 같은 자리만 맴돌다 .. 더보기
여행길에 맞은 서른, 나에게 길을 묻다 길 위에서 나이 한 살을 더했다. 서른이다. 서른이란 놈은 참 고약하다. 유랑생활에 정신없던 내 뒷덜미를 녀석은 인정사정없이 붙들었다. 무방비 상태였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느라 녀석이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피 끓는 젊음', '눈부시게 푸른 청춘'에 이별을 고하자면, 무언가를 정리하고 결의해야 하지 않는가. 녀석의 기습에 그저 멍하게 20대를 떠나보내야 했다. 느닷없이. 이 글은 서른을 맞은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의 단상이다. 아니 그보단 푸념 혹은 끼적임에 가깝다. '서른이 뭐 별거냐!', 일찍이 서른을 맞이한 선배들의 질책이 귓전을 맴돈다. 하지만 초보에겐 뭐든 두렵고 막막한 법. 당신들의 격려를 바란다. 아울러 올해 서른이 된 1980년 생 동지들의 공감을, 예비 서른의 기로에 선 후배.. 더보기
마추픽추에서 가진자의 잔혹함을 보았다 성난 태양은 천지간 만물을 녹일 기세다. 머리 꼭대기에 똬리를 튼 볕 앞에 자외선 차단제 따윈 조소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나절이 못돼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이 돋더니, 생채기에 소금을 댄 듯 따끔거린다. 사람뿐이랴. 철옹성처럼 우뚝 선 건물도, 강철처럼 단단한 아스팔트 도로도 대자연의 공세에 무력하게 아지랑이 숨만 토해낸다. 무엇이 페루 하늘의 태양을 진노하게 만들었을까? 페루는 태양 신의 후손인 잉카족이 세운 나라다. 13세기 말 페루에서 제국의 초석을 다진 잉카인은 선진문명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을 통합해 갔다. 200년 동안 발전을 거듭한 끝에 잉카제국은 페루를 중심으로 지금의 에콰도르·아르헨티나·칠레에 이르는 너른 땅을 다스린다. 짧은 시간에 남미 최대의 문명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들은 제국 곳.. 더보기
에콰도르의 불평등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지구 자전축과 직각을 이루는 위도 0도의 선', 적도다. 역시 딱딱한 용어를 사용한 정의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쉽게 설명해 보자. 스케치북에 지구를 그린 후 이를 반으로 접을 때 생기는 종이 자국, 지구본의 어느 한 가운데 굵은 펜을 갖다 대고 빙그르르 돌릴 때 그려지는 선, 지구 정중앙을 가르는 선이 적도란 얘기다. 스페인어로 에콰도르(Equador)는 적도를 뜻한다. 남미 북서부의 작은 나라 에콰도르는 국명에서 알 수 있듯 적도에 자리하고 있다. '위도0도 적도에 위치한 그곳은 아마 덜함과 더함이 없는 평등함을 간직하고 있겠지?' 적도는 치우침이 없다. 북극점과 남극점 사이에서 지구를 정확히 두 개의 반구로 나눈다. 위도 0도…, 덜함과 더함이 없는 숫자 0처럼 적도는 공명정대한 선이다. 그래서일.. 더보기
눈앞 이웃나라…그러나 넘기 힘든 국경 특정한 상황에서 악재가 반복될 때 이를 징크스라 한다. '국경 징크스'…, 거듭 찾아드는 불운의 사태를 나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나라 사이 경계가 곧 국경이다. 한 대륙 안에 여러 나라가 더부살이하는 만큼 남미에는 국경이 참 많다. 남미 지도를 펼쳐놓고 국경을 표시하면, 요리조리 그려진 빗금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대개 국경 폭은 수백 미터를 넘지 않는다. 걸어서 5분이면 건널 수 있는 짧은 거리지만,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내겐 망망대해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걸어서 5분이면 충분한 짧은 거리…돈에 눈먼 '부패 경찰'과 실랑이 저렴한 요금에 현혹, 버스 잘못 타…거액 벌금에 복잡한 행정절차까지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로 향하는 길목. 국경을 앞두고 느닷없이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 더보기
어제도 한 장…오늘도 한 장…책 없이 독서를 한다 문득 사무치게 책이 그리웠다. 7개월 동안 활자를 접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단 깨달음을 향한 간절함이 더 컸다. 스스로 말하기 겸연쩍지만,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취미를 물어오면 주저 없이 책 읽기라고 답하곤 한다. 신에게 밉보여 끝없이 갈증을 느껴야 하는 그리스신화 속 '탄타로스'처럼 나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있다. 독서를 통해 책의 정수를 빨아들일 때면, 한 여름 논바닥처럼 갈라진 내면의 대지가 촉촉이 젖어 옴을 느낀다. 이런 희열 때문에 습관처럼 책을 읽었더랬다. 바다·산·빙하, 그 안에서의 깨달음 짜릿한 희열 안고 또 새로운 곳으로 입에 가시가 돋는 경지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어쨌든 반년이 넘도록 책과 결별한 내게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오가다 만나는 한국 여행.. 더보기
세계의 끝에 선 기분을 아시나요? 세계의 끝, 우수아이아에 왔다. 세계의 끝이라…, 어감이 참 멋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수아이아는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끝'이라 해야 옳다. 바다 너머 남극이 있기에 우수아이아가 세계의 끝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덕지덕지 토를 단 정의는 운치가 없다. 세계의 끝, 얼마나 간결하고 낭만적인가. 우수아이아는 파타고니아 최남단에 자리한 작은 도시다.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의 남쪽 지역으로, 세계에서 남극과 가장 가까운 대륙이다. 고로 '우수아이아=세계의 끝'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여정을 앞두고 우수아이아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도대체 세계의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은 살까? 듣도 보도 못한 괴 생명체가 있진 않을까? 날씨가 혹독한 거 아닐까? 하늘과 땅이 맞닿아 .. 더보기
아르헨티나에서 실컷 쇠고기를 먹었다 도시는 저마다의 색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면 여행자 각자의 경험이 도시의 색을 정한다. 나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빨간색'으로 기억한다. 여행 6개월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년 여정의 딱 절반을 소화했을 뿐인데, 심신에 쌓인 피로가 꽤나 깊었던 모양이다. 역시 낯선 곳을 떠도는 일이란 쉽지 않다. 나는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여행 중에 휴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여행자에겐 여행이 곧 일상이다. 업무에 시달린 직장인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듯 여독에 찌든 장기여행자 역시 적절한 시기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내 달력은 온통 '빨간 날'이었다. 긴 호흡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산문 같은 .. 더보기
거대한 '모아이' 정말 외계인 아닐까? 섬은 본디 외롭다. 망망한 바다에 홀로 서서 늘 대상을 그려야 하는 숙명 탓이다. 뭍에서 수십 리만 떨어져도 그러한데,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아득한 곳에 자리한 섬은 오죽하랴. 이런 의미에서 이스터섬(Easter Island)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섬이다. 고독한 섬은 말이 없다 칠레령의 이스터섬은 본토에서 무려 3800km나 떨어져 있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동쪽 끝에 위치한 이 화산섬으로 가기 위해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를 탔다. 5시간을 쉼 없이 날아서야 태평양 한 가운데 오도카니 자리한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의 원래 이름은 원주민 언어로 '큰섬'을 뜻하는 '라파누이'다. 이스터섬이란 명칭은 네덜란드 탐험가가 1722년 부활절(Easter day)에 섬을 발견한 데서 유래했다... 더보기
멕시코 원주민의 삶, 벽화에 고스란히 사람들은 예술품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전시하길 좋아한다. 그런 까닭에 세상엔 미술관이 지천에 널려있다. 6개월 동안 들른 미술관 수가 손발을 다 합쳐도 못 셀 정도로 많다. 사조별·연대별·나라별…, 아무튼 진짜 많다. 불행히도(?) 나는 그림에 취미가 없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인상파'니 '입체파'니 '야수파'니 하는 사조를 불량서클 이름으로 착각할 만큼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저 그림 앞을 서성이다가 교과서에서 본 유명한 작품을 마주하고 신기해하는 게 고작이다. 저명한 평론가가 쓴 작품해설을 바탕으로 그림의 의미를 곱씹어 보지만, 명화는 범부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안 가면 그만 아니냐고?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까지 가서 그 유명한 작품을 안 봤냐는 주위의 타박이 두렵다.. 더보기
혁명의 나라 쿠바의 힘은 '긍정' 낡은 건물마다 균열이 무성하다. 노년의 낯에 파인 잔주름 같다. 칠이 벗겨져 잿빛을 띠는 여염집에 너덜너덜한 빨래가 나부낀다. 골목마다 맨발의 아이들이 야구를 한다. 아무렇게나 꺾어 자른 나무작대기와 실밥 터진 고무공이 전부다. 깨지고 갈라진 도로 위로 듣도 보도 못한 자동차가 달린다. 하나같이 수십 년 전 출고된 옛 기종이다. 벽면마다 혁명에 대한 선전구호와 함께 낯익은 얼굴이 새겨져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다. 그 옆으로 반라의 사람들이 시가를 질겅이며 망중한을 즐긴다. 낡은 오디오에선 의 재즈음악이 흐른다. 먼지 뽀얀 흑백 필름 속 장면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쿠바인의 일상이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외딴섬 쿠바는 성장을 멈춘 '피터팬' 같다. 급변하는 세상에 등 돌린 그들의 삶.. 더보기
지구별 여행자가 미국이라는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Dear 미국. 떠나는 길에 몇 자 남깁니다. 돌이켜보면, 당신을 느끼고 체험하는 과정은 참 힘겨웠습니다. 당신은 안보를 구실로 한낱 여행자를 가혹하게 다뤘어요. 당신 앞에서 저는 늘 잠재적 '해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공항에 들어섭니다. 심문이 시작되죠. 언제나 저는 열외로 분류, 한쪽으로 내몰립니다. 이상한 기계가 '휙휙'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온몸을 훑고 성분을 알 수 없는 약품으로 제 소지품을 마구 문지릅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지문을 채취당합니다. 차가운 바닥에 짐을 쏟아내고 일일이 해명해야 합니다.(도대체 속옷 따위가 뭐 그리 위협적이라는 건지) 그렇게 한참을 들쑤시고는 고작 비행기 표에 통과해도 좋다는 도장 하나를 '꽝' 박습니다. 마치 가축에 등급 낙인을 찍듯. 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