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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6 저렇게 춤 추다가 죽는 거 아닐까... (7)
  2. 2009.09.28 중동 모래사막에서 미아 될 뻔한 사연 (10)
  3. 2009.09.17 저의 세계일주를 소개합니다 (17)
  4. 2009.09.09 이스터섬 모아이 빨간 모자의 비밀이 밝혀졌다? (10)
  5. 2009.08.30 히말라야 중턱에 한국의 수제비를 파는 집이 있다 (17)
  6. 2009.08.07 히말라야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7)
  7. 2009.08.02 한국 청양고추의 자존심을 걸고 멕시코인과 매운맛 대결 (7)
  8. 2009.07.15 죽었다 살아나는 섬을 아는가? (9)
  9. 2009.07.14 "1년간의 세계일주", 내가 바라본 지구촌 6대륙 (13)
  10. 2009.07.08 156명이 죽었답니다. 제 친구들은 무사할까요? (64)
  11. 2009.06.28 한국은 구제불능한 나라라더니... (10)
  12. 2009.05.19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 (13)
  13. 2009.05.04 365일 두시간만에 여행이 끝났습니다 (44)
  14. 2009.04.29 야생사자를 보니 인간의 욕심이 부끄러웠다 (27)
  15. 2009.04.28 8개국 청년들과 아프리카를 횡단하다 (4)
  16. 2009.04.26 만델라 이후에도 인종차별은 살아 있었다 (33)
  17. 2009.04.24 피라미드 정상엔 바가지 상술이 있었다 (9)
  18. 2009.04.22 시리아 여행에서 편견의 무서움을 알았다 (36)
  19. 2009.04.22 여행길에서 나의 편견과 이중잣대를 생각하다 (4)
  20. 2009.04.21 이스탄불은 문명충돌 위기 어떻게 극복했나 (34)
  21. 2009.04.20 유럽에 비해 한국청년들은 너무 착하다 (168)
  22. 2009.04.19 단조로운 유럽보다 모로코의 혼잡함이 좋다 (9)
  23. 2009.04.18 세계여행길에서 느낀 서양과 동양의 차이 (8)
  24. 2009.04.17 여행길에 맞은 서른, 나에게 길을 묻다 (13)
  25. 2009.04.17 마추픽추에서 가진자의 잔혹함을 보았다 (12)
  26. 2009.04.16 에콰도르의 불평등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8)
  27. 2009.04.14 눈앞 이웃나라…그러나 넘기 힘든 국경 (1)
  28. 2009.04.14 어제도 한 장…오늘도 한 장…책 없이 독서를 한다
  29. 2009.04.14 세계의 끝에 선 기분을 아시나요? (9)
  30. 2009.04.13 아르헨티나에서 실컷 쇠고기를 먹었다 (1)
 

내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라는 지명을 처음 들은 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통해서였다. 여행을 시작하기 한 해 전으로 기억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 뮤지컬은 잘 알려진 대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를 원작으로 한다. 극 중반께 여주인공 에스메랄다가 부르는 노래가 있다. <보헤미안>이란 곡인데 가사 중에 안달루시아가 자주 등장한다. 집시였던 에스메랄다는 유랑생활을 숙명으로 여기던 그들 조상과 마찬가지로 떠도는 생활에 익숙하다. 파리에 정착한 그녀는 삶이 고달플 때면 이 노래를 부르며 집시에게 자유를 선사했던 안달루시아를 그린다.


“맨 발로 뛰놀았던 그곳, 안달루시아!, 안달루시아!, 안달루시아!”


그래서일까. 내 상상 속 안달루시아는 집시 에스메랄다를 닮았다. 아리따운 외모에 쾌활한 성격, 자유분방하고 생동감 넘치던 그녀의 이미지는 그대로 안달루시아에 투영됐다. 스페인 아니 유럽 여행을 통틀어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주저 없이 안달루시아를 꼽았던 이유다.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에 도착하고서 나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눈앞의 풍경이 내가 그려왔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때의 영화로움을 뽐내려는 듯 안달루시아 곳곳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흔적, 가톨릭 문화와 더불어 도심을 수놓고 있는 그 모습이 생경하다. 성당의 첨탑과 이슬람을 상징하는 격자 타일의 어색한 동거, 이슬람 건축의 결정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그 옆에 늘어선 고딕 양식의 엇박자, 이교의 풍경이 한 데 뒤섞인 이곳이 바로 안달루시아다.


                                                        <사진출처 : 스페인 관광청>                                       

이슬람과 가톨릭의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부조화는 오히려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곱디고운 얼굴을 하고는 선머슴처럼 뛰놀던 에스메랄다, 외모와 성격의 부조화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균형 잡힌 것보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절기에 맞춰 불어오는 소소리바람은 지중해의 태양을 이기지 못하고 훈풍으로 바뀌어 귓가를 간지럼 태운다. 에스메랄다의 속삭임처럼 달콤하다.


안달루시아에 머무는 동안 나는 왜 그토록 에스메랄다가 이곳을 동경했는지 깨달았다. 이베리아반도 남부에 위치한 안달루시아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 지척이다. 지리적 특성 상 두 대륙 간의 교류가 활발했다. 또한 세비야를 비롯해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지에서 이슬람 문화를 쉽게 발견할 수 있듯 이곳은 가톨릭과 이슬람이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다투던 종교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인종과 종교가 얽히고설킨 까닭에 안달루시아는 다른 유럽지역보다 이질적인 것에 관용적이었다. 세계 각지를 떠돌며 온갖 박해와 탄압을 받았던 집시들에게 안달루시아의 관용은 눈물겨웠으리라.


이런 까닭에 안달루시아 지역엔 집시의 문화와 풍습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집시들의 춤인 플라멩코다.


                                                         <사진출처 : 스페인 관광청>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여행하며 숱하게 많은 종류의 춤을 봤지만 이토록 진한 감동을 주는 춤은 처음 이었다. 사실 플라멩코보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춤은 많다. 관능미로 치자면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화려함으론 브라질의 삼바나 인도의 밸리가, 흥겨움으론 콜롬비아와 쿠바의 살사가 플라멩코보다 한 수 위다. 이런 열세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건 플라멩코가 발하는 열정이다.


플라멩코는 15~16세기 경 안달루시아로 흘러들어온 집시들이 만들었다. 예능에 재능을 보인 집시들은 자신들 고유의 노래에 안달루시아 지역의 가락을 혼합하고, 이에 맞춰 춤을 쳤다. 그것이 플라멩코의 시초였다.


전 세계를 떠돌며 온갖 박해를 받았던 집시들의 춤사위는 삶의 애환을 담은 슬픈 몸짓이다. 그래서 플라멩코는 화려하거나 흥겹기보다는 소박하고 절제된 느낌을 준다.


한을 풀려는 듯 저들은 동작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속세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려는 손발 짓은 때론 처절하다. 무희들은 언제나 무대에서 스러져 죽을 각오로 춤을 춘다.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이 빚어내는 ‘안달루시아의 영혼’ 플라멩코가 열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Posted by 탄타로스

주말에 술을 좀 마셨습니다. 사실 과음했습니다. 간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날이 꼴딱 새는 줄 모르고…. 선배들껜 죄송한 말씀이나 서른 줄에 접어드니 확실히 몸 상태가 전 같지 않습니다. 피 끓던 스무 살 시절엔 이틀을 달아 마셔도 ‘조각 잠’이면 충분했는데, 지금은 종일 자도 숙취란 놈을 떼어 내기 힘듭니다. 뒤끝 중에서도 제일 괴로운 게 속병입니다. 평소에도 소화력이 왕성한 편이라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립니다. 술 마신 다음날은 아주 뒷간 문지방이 닳습니다. 뒤틀린 배를 움켜잡고 오만상을 쓰는 꼴이 제가 봐도 가관입니다. 하여튼 이놈의 ‘변’ 때문에 저는 고생을 참 많이 합니다. 세계일주 중 중동에서 미아가 될뻔 한 적이 있습니다. ‘변’ 때문에 겪은 ‘변(變)’이었지요.

추억의 부스러기 다섯 번째 이야기

                                                       <인디아나존스의 배경인 요르단 페트라>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이어지는 중동 여행의 백미는 역시 ‘잃어버린 도시’로 알려진 페트라다.

 

요르단 와디무사의 페트라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교차점에 위치, 선사시대부터 수 백 년 동안 상업의 중심지로 호황을 누렸다.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이 카라반의 도시는 6세기경 역사에서 모습을 감춘다. 여러 가설 중 지진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페트라는 1812년 무려 12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배경지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페트라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영화 속 인디애나 존스처럼 나는 고대도시를 찾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페트라를 보기 위해선 먼저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요르단 수도인 암만으로 가야했다. 이 때 열악한 대중교통이 발목을 잡았다. 양 도시를 잇는 대중교통은 버스가 유일하다. 물론 가난한 배낭여행에게 그림의 떡인 항공편을 제외하고서 그렇다. 명세기 국경을 넘는 국제버스지만 그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다. 편수도 얼마 없을뿐더러 소요시간도 들쭉날쭉하다.


어느 나라건 이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 우리로 치면 장거리 총알택시에 해당하는 자가용 운수업자들이 양 수도를 연결한다. 버스비보다 1.5배 정도 비싸지만 소요시간은 버스의 절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빠르다. 시간을 금 쪽 같이 여기는 배낭족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교통수단이다.


나는 옹기종기 모인 택시 중 하나를 잡아타고 기사의 요구대로 돈을 지불했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도 택시는 꼼짝하지 않는다. 영어가 통할 리 만무하니 영락없이 꿀 먹은 벙어리 신세다. 30분이 넘어도 갈 기미가 안 보인다. 기사에게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니 다짜고짜 손가락 4개를 펴든다. 아뿔싸! 4명이 찰 때까지 운행을 안 한단 얘기였다. 그게 그 바닥의 법칙인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새벽같이 서둘러 나온 보람도 없이 3시간을 꼬박 버티고서야 택시가 출발했다. 정오를 훌쩍 넘긴 후다.


택시 때문에 시간을 허비한지라 해가 지고서야 암만에 도착했다. 페트라가 있는 와디무사로 가기 위해선 다시 버스를 타야했다. 하루 종일 먹지 못한 탓에 속이 쓰려왔다. 하지만 와디무사 행 버스가 막차였던지라 공복을 부여잡고 버스에 올라야 했다.


이번엔 버스가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막차 출발시간은 지난 지 오래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와도 되는 분위기다. 올 때 보았던 버스정류장 입구의 케밥 집이 떠올랐다. 먹거리를 생각하자 배고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희망고문’이 따로 없다. 고민 끝에 잽싸게 입구로 뛰었다. 시계를 가리키며 케밥 집 주인을 다그쳤다. 포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케밥을 낚아채고는 부리나케 달렸다. 다행이다. 버스는 그 자리에 우직하게 서있다.


버스에 오르기 무섭게 게걸스럽게 케밥을 먹어치웠다. 행복했다. 한 숨 돌리고 나자 아랫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난감했다. 참으려 발버둥 칠수록 소화력 왕성한 장은 방금 삼킨 케밥 덩어리를 가차 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중동 버스다. 일단 출발하면 휴게소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무조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뛰었다. 정류소 한편의 화장실에서 한바탕 일을 치렀다. 대충 옷을 추스르고 나왔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버스가 사라졌다. 가난한 여행자의 1년 치 생필품을 실은 채로.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여행을 통틀어 가장 고마운 은인이 ‘짠’하고 나타났다. 버스정류장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울상인 나를 보고는 그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패닉상태에 빠진 탓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버스, 페트라, 화장실, 사라졌다“


횡설수설한 내 말을 알아들었나 보다. 어디선가 낡은 군용트럭을 몰고 오더니 타란다. 추격전이 벌어졌다. 버스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아는지 그는 차선을 바꿔가며 맹렬히 달렸다. 20여분을 달렸을까. 먼발치에 신호대기 중인 버스가 보였다. 트럭은 버스 꽁무니에 붙어 경적을 울려댔다. 갓길에 정차한 버스에 오르자 기사가 ‘씩’하고 웃는다. 이보다 더 능글맞을 순 없다. 육두문자가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았다. 인원체크도 안하냐고 따져 물으려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은인이 떠올랐다. 경황이 없던 터라 이름조차 묻지 못했다.


앞으로 또 중동에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기회가 닿는다면 요르단 암만에서 그를 찾아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다. 암만 버스터미널에서 일하는 키 175cm 가량의 호리호리한 몸매, 수염이 얼굴을 뒤덮었던 아무개 씨께 감사드린다. 당신은 나의 영웅이다.



 

Posted by 탄타로스

부산일보에서 제 여행경험을 소개하고 싶단 제의를 해왔습니다. 세계일주 관련 기획을 하던 중 제 소식을 들었다네요. 누군가를 취재한 경험은 많지만, 막상 그 대상이 되려니 쑥스럽더군요. 창원의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시간 넘도록 많은 이야기를 뱉어 낸 것 같은데, 신문지면은 '축약'의 진수를 보여줬습니다. 못다 실린 얘기는 이곳 블로그를 통해 공유할 생각입니다.  

아래는 부산일보 지난달 20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그래, 어디가 가장 좋던가요?"

지구 한 바퀴를 꼬박 돌고 왔다는 윤유빈(29·경남 창원시 반림동)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 2008년 4월부터 올해 4월까지 정확히 365일 2시간 동안 5대양 6대주 30개 국가 135개 도시를 여행했다. 그에게 대뜸 물었다.

"100곳의 여행지엔 100가지 색깔이 있듯 여행지도 우열을 가릴 수는 없죠. 그래도 꼭 꼽으라면 남미를 택하겠습니다. 자연경관도 수려하지만 사람들이 너무나도 열정적입니다. 1년 내내 축제 분위기에 사는 그들을 마주하면 에너지가 전이 되는 느낌을 받아요."

'지구별 누비기(jigubon.tistory.com)'라는 여행 블로그를 운영하는 윤씨의 필명은 '탄탈로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음식을 훔친 죄과로 영원한 갈증과 굶주림의 형벌에 고통 받는 존재다. 윤씨가 세계 일주라는 모험에 나선 것도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같은 동경 때문이었다. 경남의 한 일간지에서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던 그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하면서 더 넓은 세상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인터넷과 관련 서적을 뒤져 6개월간의 준비 끝에 드디어 지난해 4월 직장 생활을 통해 모아 둔 2천500만원의 여행 경비와 가방 3개를 짊어지고 중국을 시작으로 1년 간의 장도에 올랐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안정된 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가야 하는 것이니까요, 갔을 때 얻을 것과 잃어야 할 것을 따져 보고. 결국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란 생각으로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아 스스로를 다잡았죠."

'끊임없이 비우고, 끊임없이 배우자'는 다짐 아래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거쳐 북미와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순의 여정으로 남극을 제외한 '지구별' 대륙을 모두 섭렵하자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낯섦은 곧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었다. 아찔한 순간도 많이 겪었다. 중국 칭다오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윤씨가 떠나온 지 불과 3일 만에 쓰촨 성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사정을 모른 채 2주 뒤 태연히 집에 연락을 했을 때는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남아공에서는 어렵게 구한 음식을 강도를 만나 빼앗기기도 했고, 실크로드를 지날 때는 꼬박 40시간 동안을 비좁은 열차에 웅크리고 있는 바람에 이틀 동안 앓아눕기도 했다. 여행 1년 만에 몸무게가 11㎏나 빠졌다.

무엇보다 힘든 건 지독한 외로움에 여행의 목표 의식과 방향성을 잃는 것. 장기 여행자들의 상당수는 3개월 정도가 지나면 여행의 매너리즘에 시달린다. 아름다운 풍광을 봐도 별 감흥을 못 느끼게 되고 결국 중도 귀국하고 만다.

"당장 비행기 표만 끊으면 편안히 돌아갈 수 있다는 악마 같은 유혹이 수시로 괴롭혔어요. 그럴 때 마다 내가 뭣 때문에 이 길을 나섰는지 초심을 되새겼죠."

윤씨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편견을 깬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강조했다. "시리아 하면 '악의 축'이란 이미지가 강한데 막상 가보니 가장 친절한 사람들이 시리아인이었어요. 반대로 쿠바의 경우 많은 여행서적들이 강아지도 춤을 추는 지상 낙원이라고 미화하지만 실상은 미국의 금수 조치 때문에 돈이 있어도 사 먹을 게 없어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백수가 된 그는 요즘 여행기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 다음은 아직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다. "후회요? 없습니다. 1년 동안 입에 단 내 날 정도로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더 단단해진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당시의 힘들었던 기억과 경험들이 살아가는데 큰 자산이 되겠죠. 후회하지 않으려면 당장 짐을 꾸려 떠나보세요."

박태우 기자





Posted by 탄타로스

세계일주 후 신문 읽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국제면부터 펴보는 습관이 생긴겁니다. 예전엔 1면부터 읽다가 국제면은 대충 훑고 넘어갔더랬습니다. 기껏해야 제목 혹은 리드문단에만 잠깐씩 눈길을 주곤 했죠. 지금은 국제면을 꼼꼼이 톺아봅니다.

오늘자(9월 8일) 신문 국제면에 '모아이 빨간 모자의 비밀 밝혀져'란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띕니다. 모아이는 칠레령 이스터섬의 거대한 인면석상을 말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한국에선 서태지 뮤직비디오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수백구의 모아이 석상은 그 크기나 모양이 다양한데, 일부 모아이 머리위에 빨간색 모자가 씌어져 있습니다. 아래 모아이 사진 중 오른편 끝단의 모아이 머리 위에 둥근 덩어리가 씌어져 있는게 보이시죠? 기사에서 얘기하는 빨간 모자입니다.


모아이 몸통과 빨간 모자 제작에 사용된 돌은 그 재질이 서로 다릅니다. 몸통 제작에 사용된 돌은 그 성분과 출처가 일찌감치 밝혀졌지만, 빨간 모자 제작에 쓰인 돌에 대해선 그간 알려진 게 없었습니다. 오랜시간 이를 파헤친 학계가 드디어 빨간 돌 모자의 출처를 알아냈다는 게 기사의 요지입니다.

아래 사진은 화산섬인 이스터섬의 분화구입니다. 분화구 한 편이 부서진게 보이시나요? 이스터섬엔 이렇듯 드문드문 파인 분화구가 많습니다. 원주민들이 빨간 모자를 만들기 위해 붉은 화산암재를 캐낸 흔적이라네요. 분화구가 바로 빨간 모자 제작에 사용된 돌의 출처였던 것이죠. 이스터섬을 여행할 때 부서진 분화구를 보고 의아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립니다.


근데 기사가 좀 불친철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기사는 이스터섬과 모아이에 관한 배경설명 없이 다짜고짜 빨간 모자 이야기를 꺼냅니다. 저처럼 여행을 다녀왔거나 고고학에 관심이 많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이스터섬과 모아이에 대한 제 여행글을 첨부합니다. 

<이스터섬과 모아이
>


섬은 본디 외롭다. 망망한 바다에 홀로 서서 늘 대상을 그려야 하는 숙명 탓이다. 뭍에서 수 십 리만 떨어져도 그러한데,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아득한 곳에 자리한 섬은 오죽하랴. 이런 의미에서 이스터섬(Easter  Island)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섬이다.


칠레 령의 이스터섬은
본토에서 무려 3800km나 떨어져 있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동쪽 끝에 위치한 이 화산섬으로 가기위해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를 탔다. 5시간을 쉼 없이 날아서야 태평양 한 가운데 오도카니 자리한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의 원래 이름은
원주민 언어로 ‘큰섬’을 뜻하는 ‘라파누이’다. 이스터섬이란 명칭은 네덜란드 탐험가가 1722년 부활절(Easter day)에 섬을 발견한 데서 유래했다. 1888년 칠레가 섬을 소유한 이후 스페인어로 ‘이슬라데파스쿠아’라 명명했지만,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이스터섬으로 통용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제국주의 냄새가 짙게 베인 ‘이스터섬’이나 ‘이슬라데파스쿠아’보다 ‘라파누이’란 본래 이름이 맘에 든다. 저들이 크리스마스에 제주도를 발견하고는, 제 멋대로 ‘크리스마스섬’ 따위로 부른다면 얼마나 어의가 없겠는가.


이스터섬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거대한 인면석상 모아이 때문이다. 1m의 작은 석상에서부터 30m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까지 이스터섬에는 550여 구의 모아이가 있다. 누가 무슨 연유로 모아이를 만들었는지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또 학계에선 당시 기술로 수 십 톤의 돌덩이를 정교하게 깎고, 이를 해안 곳곳으로 옮긴 사실을 불가사의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부풀리기 좋아하는 몽상가들은 외계인설을 주장하거나, 모아이가 스스로 걸어 다니는 신물이었다고 믿는다. 황당한 얘기 같지만 실제 섬을 둘러보면 ‘진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착각이 든다. 그 만큼 섬은 신비로 가득하다.


나는 오토바이를 한 대 빌려 섬을 돌아보았다. 야간 조명등, 나침반, 지도 등의 장비와 먹거리로 가득 찬 배낭을 두르고 고고학자라도 된 양 모아이를 찾아 나섰다.


모아이는 주로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아후’라 불리는 제단 위에 우뚝 선 모아이의 자태는 웅장했다. 이들 모두 섬의 동쪽에 자리한 라노라라쿠 언덕에서 만들어졌다. 모아이 제조 공장에 해당하는 라노라라쿠에서 수 십 킬로나 떨어진 해안까지 이 거대한 모아이가 옮겨진 것이다.


섬은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황량하다. 모아이 이동에 사용할 목재 지렛대나 수레를 만들 수 없다는 얘기다. 어림잡아 수 천 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민의 인력만으로 이를 행하는 것 역시 믿기 힘든 일이다.


이 때문에 이스터섬의 모아이는 한 동안 고고학계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방사선탄소연대법 등 새로운 측정기법이 등장한 후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학계에서는 모아이가 만들어진 시기의 이스터섬은 산림으로 울창했을 거라 추측한다. 또 지금까지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많은 수의 원주민이 살았을 거라 짐작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섬이 급속히 쇠퇴, 결국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섬으로 전락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먼저 자멸설이다. 각 부족들이 경쟁적으로 모아이 석상을 만들면서 무리하게 목재를 채벌한 결과 토양침식으로 섬이 황폐화 됐다는 것이다. 원주민 스스로가 사람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는 가설이다. 이는 오랫동안 정설처럼 굳어졌고, 이스터섬은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지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례가 됐다.


하지만 최근 이에 반하는 가설이 나왔다. 자멸설은 이스터섬을 침략한 자들의 자기합리화일 뿐 섬의 황폐화는 오히려 외부인 때문이라 것.


반대측은 유럽인이 원주민을 노예로 끌고 가 섬의 인구가 급속히 줄었다고 주장한다. 또 산림고갈 역시 이들의 배에 섞여 들어온 쥐떼가 급격히 증가, 야자나무 씨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탓이라고 믿는다.


진실은 모아이만이 안다. 자멸설이든 타멸설이든 하나같이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비극이란 점에서 이스터섬이 주는 교훈을 허투루 여겨선 안된다.


<지구별단상>



모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는 진실을 알고 있지? 어째서 섬이 이 지경이 된거니?”

침묵으로 일관하던 녀석은 내가 물러서지 않고 채근하자 그제야 입을 연다.

“개구리는 시내나 도랑에서 나는데 꼭 인가의 계단이나 뜰 사이를 기웃거려. 그러다 닭에게 잡혀 번번이 목숨을 잃지. 개구리가 저 있어야 할 데 있지 않고, 인가를 찾는 이유는 땅이 기름져 벌레가 많기 때문이야. 한 끼 배불리 먹자고 목숨을 버리는 셈이지. 작은 이익만 보고 후에 따를 재앙은 생각지 못하는 거야. 세상엔 인간개구리가 너무 많아.”

그렇다. 세상에는 인간개구리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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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수제비를 먹었습니다. 일명 '항아리 수제비', 항아리만큼 커다란 그릇에 한가득 담긴 수제비가 참 맛났습니다. 문득 히말라야 중턱에서 먹었던 '뗌뚝'이 떠오릅니다.

추억의 부스러기 네번째 이야기……

향신료가 강한 인도 음식에 슬슬 진저리가 처질 즈음, 다람살라(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히말라야 중턱의 고산 도시)에 도착했다. 티베트를 그대로 옮겨놓은 만큼 먹거리 역시 티베트 전통음식이 주류를 이뤘다.


티베트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다. 우리네 청포묵을 빼다 박은 ‘라핑’을 비롯해 수제비와 흡사한 ‘뗌뚝’, 칼국수를 닮은 ‘뚝빠’, 만두와 비슷한 ‘모모’ 등 식욕 잃은 한국여행자에게 다람살라는 ‘미각재활훈련센터’같은 곳이다.

                            <우리네 수제비와 만두를 뺴다 박은 티베트 전통음식 '똄뚝'과 '모모'>

한날 이곳저곳을 쏘다니다 라핑을 파는 노점을 발견했다. 히말라야 산중턱에 자리해 조금만 움직여도 체력소모가 많은 탓에 무척 허기진 상태였다. 라핑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우고 또 한 그릇을 시켰다. 먹는데 정신팔려있던 나를 주인아주머니가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바닥을 드러낸 그릇에 라핑을 한 가득 담아주며 웃는다. 그렇게 서 너 그릇을 비우고야 포만감이 밀려왔다.

                                      <청포묵과 닮은 라핑을 한 가득 담아주시는 아주머니>

돈을 내미는데 아주머니가 한사코 한 그릇 값만 받겠단다. 실랑이 끝에 두 그릇 값을 지불하기로 했다. 음식 맛 뿐 아니라 후덕한 인심 또한 한국의 그것을 닮았다.


다람살라에 머무는 내내 그 집을 찾았다. 영어를 못하는 아주머니와 티베트어를 못하는 나, 우리는 늘 말이 없다. 아주머니는 멀리서 내 모습이 보이면 큰 대접에 라핑을 듬뿍 담아 놓는다. 바닥이 보일라치면 다시금 라핑을 퍼 담기를 반복하고는 씩 웃는다. 라핑을 입 한 가득 우겨넣은 채로 나도 웃는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솔하고 따뜻한 대화였다.







Posted by 탄타로스

여성 산악인 오은선 씨가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까지 단 1개 봉우리만을 남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3일 8068m 가셔브룸Ⅰ정상을 밟은 오 씨가 마지막 남은 안나푸르나(8091m) 등정에 성공할 경우,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록하게 된답니다. 기쁜 일입니다. 근데 가슴 한 편이 쓰리고 아릿합니다. 얼마 전 낭가파르바트 하산 도중 추락사한 고(故) 고미영 씨 때문입니다.

고미영 씨 사고 이후 대한민국 산악계로 쓴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여성 세계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란 타이틀을 놓고 벌어진 오 씨와 고 씨 간 무리한 경쟁이 화를 불러왔단 비난이었습니다. ‘최고’ 혹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아야 비로소 조명 받는 산악계의 ‘승자독식주의’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쳐온 두 여성 산악인을 ‘과열경쟁’의 희생양으로 삼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 씨와 고 씨는 한국에 머물 때 매일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죠. 누군가가 해외원정길에 나설 때면 진심을 다해 응원하는 그런 사이였다죠.

‘과열 경쟁’에 따른 인재였는지, ‘선의의 경쟁’에도 어쩔 수 없었던 불의의 사고였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결코 히말라야를 두고 세속적인 다툼을 벌이지 않았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본 히말라야는 ‘어머니’이고 ‘스승’이었습니다. 산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산을 닮기 마련입니다. 히말라야를 오롯이 가슴에 품은 그들에게 그런 옹졸한 마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안나푸르나 등정을 남겨 둔 오은선 씨를 응원하며, 고(故) 고미영 씨를 애도하며 지난날 히말라야에 올랐던 저의 단상을 바칩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이름이 희한하네. 도시 이름에 웬 만두냐."

어렸을 적 지도를 펴놓고 친구들과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네팔이란 나라는 그렇게 생소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머리가 굵어진 후에도 마찬가지. 왕이 다스리는 나라(현재는 공화국으로 전환 중이다), 국민소득에 비해 행복지수가 높은 후진국 정도가 네팔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적어도 네팔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고작 보름간의 여정으로 네팔에 대해 논한다는 건 건방을 떠는 일이다. 다만, 이번 여정을 통해 나는 히말라야 중턱에 자리한 이 힌두인의 나라에 대해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네팔은 산악국가다. 만년설의 히말라야 산맥이 나라 전체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수도 카트만두를 거쳐 히말라야 등정을 위한 베이스캠프인 포카라에 발을 디디는 순간, 네팔인에게 산은 숙명이란 걸 깨닫는다.

포카라에서는 고개만 돌리면 8000m급의 설산이 눈에 밟힌다. 여염집 담장 뒤로, 골목길 전신주 너머로 어김없이 웅장한 산이 자리하고 있다. 심지어 뒷간에 앉아 일을 보다 고개를 들어도 처마 사이로 히말라야를 감상할 수 있다.

네팔인은 히말라야를 '어머니'라 부른다. 그래서일까. 산을 닮은 그들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착했다. 그 덕에 여행 내내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던 나는 모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히말라야가 자식들에게 물려준 건 비단 심성만이 아니다. 포카라는 대자연을 만끽하려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이들이 지출하는 관광비용은 도시를 떠받치는 주요 수입원이다. 히말라야는 변변한 공장 하나 없는 포카라의 젖줄인 셈이다.

히말라야의 또 다른 이름은 '스승'이다. 산을 오르려, 혹은 그저 산을 바라보려 네팔을 찾는 이들 모두 제 나름대로 깨달음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애써 배우려 하지 않아도 '트레킹'을 통해 거대한 설산을 마주할 때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나 역시도.

등산과 맥을 같이하는 트레킹의 목적은 8000m급의 설산을 좀 더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산을 오르거나, 좌우로 횡단하는 행위다. 등산로가 한정된 우리네 산에 비해 규모가 큰 히말라야의 트레킹 코스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나는 3000m 상당에 자리한 푼힐(Poon Hill) 전망대를 목표로 나흘짜리 코스를 택한 후 히말라야에 발을 디뎠다. 산이라면 군대에서 지겹도록 오르내린 예비역 병장이다. 자신에 찬 발걸음이 가볍다. 콧노래도 새어 나온다.

한 시간이나 채 지났을까. 평탄하던 산길이 굽이치더니,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 듯 흘렀다. 좀 전의 거만함을 탓하는지 히말라야의 산등성이는 점점 더 경사를 높였다. 기다시피 산을 오르다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 악을 쓰며 걷기를 수 시간, 한계가 왔다. 다리가 꼬이고 발목이 제 맘대로 꺾이더니, 결국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무렇게나 등을 기대고 돌아앉는 순간, 히말라야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쉼 없이 산을 오르느라, 그동안 등 뒤로 펼쳐진 풍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5월의 녹음 사이로 시원한 물줄기의 계곡이 장관을 이뤘다.

인생도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스쳐 보내야 할까. 그중에는 분명히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가끔은 삶에도 '쉼표'가 필요한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해발 3000m 높이에 자리한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이른 새벽의 일출, 설산을 휘감는 벌건 빛의 향연은 그간의 고생을 충분히 보상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트레킹 코스로 푼힐을 선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다양한 지점에 전망대가 있다 보니 가끔 트랙킹 코스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가 있다. 누구는 "더 높은 곳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는 "왼쪽 쪽 측면이 훨씬 멋있다"고도 말한다.

이에 대해 십수 년간 트랙킹 가이드를 해 온 현지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설산은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나 그 만의 독특한 멋이 있다. 고도가 높건 낮건, 좌·우측이건 상관없이 하나같이 경외롭다. 당신은 그저 자신의 취향과 시간, 체력을 고려해 적절한 목표를 정하면 된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소싯적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꿈은 원대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학창시절 통지표 귀퉁이의 '희망사항'란에 소박한 꿈을 적었다간 주위에서 타박이 날아들기 일쑤다. 자의든 타의든 열에 아홉은 '과학자'나 '의사', '판·검사'를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성인이 된 후에도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다. 명예, 권력, 돈 등 행복을 재는 잣대가 정해져 있다.

자꾸만 현지 가이드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고도가 높건 낮건, 좌·우측이건 하나같이 경외롭다….









Posted by 탄타로스

세계일주증후군’의 여파로 무직 증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발적 백수라 딱히 조급하거나 초조하진 않네요. 다만 함께 놀 이가 없어 조금 적적합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입에 단 내 날 정도로 혼자다녔으니 말이죠. 방바닥을 구르다 그것도 싫증나면 제 보물 상자를 열어봅니다.  5대양 6대주가 오롯하게 담겨 있습니다. 구석에서 일기장을 꺼내듭니다. 1년 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탓에 꼬질꼬질하기가 ‘거지발싸개’ 수준입니다. 외양이야 어떻든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청년백수의 기를 살려주기에 충분합니다. 일기장에서 몇몇 글들을 발견합니다. 분명 직접 쓴 글이건만 낯섭니다. 여행 중 다니던 신문사에 연재를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그때 발탁한 ‘주연’들 말고도 ‘보조출연자’들이 여럿 있었나 봅니다. 알아보기 힘들게 휘갈긴 걸로 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들을 끼적여 놓은 듯합니다. 뒤늦게야 그들을 챙깁니다.

추억의 부스러기 두번째 이야기, 멕시코 편


 “누렁아!”

곁눈질 한번 하더니 녀석은 고개를 돌린다. 흘겨보는 모양새가 영 기분 나쁘다. 슬쩍 부아가 치민다. 먹다 남은 타코 조각을 던졌다. 반응이 없다. 다시 한 조각. 녀석은 귀찮은지 몸을 일으켜 저만치 떨어진 그늘로 자리를 옮긴다.

그랬다.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했다. 2시간 전에 시켜 딱딱하게 굳어버린 타코 주변에 파리가 들러붙는다. 새로운 놀이가 생각났다. ‘맨손으로 파리잡기’, 예전에 군대에서 침상 바닥에 앉은 파리를 상대로 곧잘 하던 놀이다. 살짝 오므린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잽싸게 바닥을 쓸면 주먹 속에 파리가 산채로 잡힌다. 주먹 속에서 웽웽 거리는 놈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 그 충격에 바둥거릴 뿐 달아날 생각을 못한다. 그렇게 생포한 파리 십 수마리가 지금 테이블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수도 멕시코시티를 떠나 푸에블라, 와하카, 팔랑케를 거쳐 이곳 산크리스토발에 왔다. 2주 동안 쭉 혼자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였던 적은 처음이다. 짧게나마 동선이 비슷한 여행자들과 함께 여행하곤 했더랬다. 사람이 그리웠다.

턱을 괴고 백일몽에 빠져들 찰라, 그가 말을 걸어왔다. 작달만한 키에 다부진 몸매, 전형적인 멕시칸이다. 곱슬머리 위에 비스듬히 눌러쓴 멕시코 전통모자 솜브렐라가 무척 잘 어울렸다. 자신을 후안이라고 소개한 그는 내 이름과 국적을 물었다.

“오! 꼬레아, 2002 월드컵, 부에노! 부에노!”

축구를 좋아한다는 그는 자국 리그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나 역시 얘기 상대가 그리웠던 터였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여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대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내가 테이블에 놓인 고추를 집어 먹었다. 타코를 시킬 때 나왔던 곁들이 음식이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그가 물었다.

“맵지 않아? 신기하네. 우리 멕시칸만 매운 거 잘 먹는 줄 알았는데”

우스웠다. 청량고추에 길들여진 내게 멕시코 고추는 그저 파프리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고추장부터 시작해서 김치, 낙지볶음 등 나는 한국의 매운 음식을 열거하며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내기를 제한했다. 매운 고추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멕시코를 대표하는 술 데킬라를 사주자는 것. 방금 먹은 고추 수준이라면 한 바구니를 가져와도 문제없겠다 싶어 흔쾌히 응했다.

그가 종업원을 부르더니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종업원이 접시 가득 고추를 담아왔다. 모양새가 방금 전 먹은 고추와 사뭇 달랐다. 더 작고 더 두꺼웠다. 불안감이 밀려왔으나 이내 마음을 다 잡았다. 뭐 크게 다르겠나 싶었다.

그가 먼저 고추 하나를 집어먹더니 우물거린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내 차례다. 보란 듯이 고추 2개를 집어 삼켰다. 씹는 순간, 아차 싶었다. 뜨거운 기운이 입안에 감돌았다. 매웠다. 정말이지 죽을 만큼 매웠다. 청량고추보다 20배는 더 매웠다. 혀에 감각이 없다. 눈물이 핑 돈다. 당황하는 나를 보더니 그가 괜찮냐고 묻는다. 웃는 낯이다. 멀리서 종업원도 키득거린다.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그가 고추 2개를 먹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거드름을 피운다. 고추 하나를 집었든 나는 선뜻 입에 가져가기 못하고 망설였다. 그가 웃는다. 조소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나는 두 눈 지그시 감고 고추를 씹었다. 아! 진짜 맵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따위 고추가 다 있담! 채소가 아니라 흉기다. 결국 나는 손을 들었다. 얼음물을 연거푸 들이켰지만, 불에 덴 듯 입안은 얼얼하기만 했다.

약속대로 그에게 데킬라를 사주었다. 속이 쓰렸다. 내기에서 졌기 때문인지, 매운 고추 때문인지 아무튼 무지하게 속 쓰린 날이었다.



 

Posted by 탄타로스
 

<옴팡지게 쏟아집니다. 이놈의 장맛비! ‘후두둑’하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백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듭니다. 달력을 보니 세계여행을 끝내고 한국 들어온 지 딱 석 달이 되는 날입니다. ‘세계일주증후군’의 여파로 무직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저로선 마땅히 할 일이 없습니다.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막걸리와 파전 생각이 간절하건만, 그냥 ‘오징어짬뽕’ 한 봉지를 집어 듭니다. 영양실조 걸린 제 지갑 녀석의 사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 울적하여라.

이럴 땐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야 합니다. 정신 건강을 위해 그리해야 합니다. 서둘러 제 보물 상자를 열었습니다. 5대양 6대주가 오롯하게 담겨 있습니다. 구석에서 일기장을 꺼내듭니다. 1년 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탓에 꼬질꼬질하기가 ‘거지발싸개’ 수준입니다. 외양이야 어떻든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청년백수의 기를 살려주기에 충분합니다.

일기장에서 몇몇 글들을 발견합니다. 분명 직접 쓴 글이건만 낯섭니다. 여행 중 다니던 신문사에 연재를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그때 발탁한 ‘주연’들 말고도 ‘보조출연자’들이 여럿 있었나 봅니다. 알아보기 힘들게 휘갈긴 걸로 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들을 끼적여 놓은 듯합니다. 뒤늦게야 그들을 챙깁니다.>



 

죽었다 살기를 반복하는 섬이 있다. 산토리니다.

그리스의 수십 개 섬 가운데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섬은 단연 산토리니. 백설기를 썰어놓은 듯 하얀 집은 저마다 옥빛 창문으로 멋을 내고서 지중해를 굽어본다. 마을 어귀마다 풍차가 돌고, 그 바람을 맞으며 살랑대는 빨래더미가 정겹다. 청정한 바다 위에 내려앉은 햇볕 조각이 파도에 반짝이고, 갈매기는 연신 자맥질을 한다. 보고 또 봐도 약비나지 않을 장면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섬을 찾아 매년 여름이면 수만의 인파가 산토리니로 몰려든다. 예약하지 않으면 숙소 잡기는 불가능하다. 식당과 상점, 기념품 가게 종사자들은 넘쳐나는 손님 덕에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그리스 본토와 섬을 오가는 페리가 하루에 십 수번 고동소리를 낸다. 생동감이 넘친다. 섬은 살아있다.

애석하게도 섬의 생명력은 짧다. 석 달 남짓한 성수기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면 섬 전체에 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뱃고동 소리가 줄기 시작한다. 섬의 심장박동도 함께 멎어간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산토리니는 죽은 섬이 된다.

나는 동장군이 기세를 떨치던 2월의 어느 날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휑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 행을 결정했을 때 많은 이들이 만류했다. 숙소 리셉션의 청년은 하루도 못돼 후회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든다. 숙소를 찾는 일부터 꼬였다. 관광업 종사자가 대부분인 까닭에 산토리니 주민들은 비수기에 섬을 떠나곤 한다. 많은 수의 숙소가 문을 걸어 잠그거나, ‘수리 중’이란  푯말을 내걸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발품을 팔고서야 방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시장기가 돌았다. 끼닐 때울 요량으로 식당을 찾아 나섰다. 여기서 또 일은 꼬인다. 도대체 문을 연 식당이 없다. ‘주인 사정으로 장기간 영업을 중지한다’는 안내문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공복감에다 피로까지 겹쳐 발걸음이 물먹은 솜 마냥 무겁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빵집이 보였다.

나흘째, 나는 12끼 째 빵을 먹고 있다. 퍽퍽한 밀가루 덩어리를 씹으며, 앞으로 평생 빵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난 사흘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곤 끼니 때 맞춰 빵을 사먹고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린 게 전부다. 그 마저도 비를 동반한 강풍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관광객은 물론이고 주민들은 다들 자취를 감췄다. 비수기 페리 운행 감축과 궂은 날씨로 언제 배가 뜰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죽은 섬에 고립됐다.

해질녘 둔덕에 올랐다. 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지대다. 황혼 무렵 섬의 자태는 형용하기 힘들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간 이 섬에도 다시 뱃고동이 울리겠지. 꽃 피는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와 섬이 살아나거든 그 때 다시 오리라.”  




Posted by 탄타로스

                                                             

아시아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 범주를 넓히면 동북아시아인, 더 확장하면 아시아인이 됩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테지요.

낯 뜨거운 고백이지만 여행 전 저는 스스로가 뿌리박고 사는 아시아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아시아 문화가 다 거기서 거기지’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다른 대륙을 동경하곤 했습니다. 문화사대주의 혹은 옥시덴탈리즘에 빠져 내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6개 대륙을 여행하고 난 후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아시아는 참 다채로운 문화를 지녔습니다. 동서로 유교∙불교∙힌두교∙이슬람교의 족적을 훑다보면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옵니다. 찬란했던 문화의 유적은 물론이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신적 가치들이 풍성합니다.

네팔의 히말라야에서,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시리아의 모래사막에서,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저는 아시아의 진면목에 눈을 뜹니다.

                                                                           <중국 만리장성>

남아메리카

여행이 끝나고 나니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어디가 가장 좋던가요?”

질문 앞에서 늘 망설입니다. 100곳의 여행지엔 100가지 색깔이 있다죠. 한낱 여행자의 시선에 가둬 우열을 가릴 만큼 세상은 단조롭지 않습니다. 화제를 돌려 슬쩍 넘어가 보지만 집요하게 추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숙고 끝에 저는 ‘남미’를 택합니다.

마야∙아스텍에서 잉카로 이어지는 고대문명은 남미의 백미입니다. 페루의 ‘마추픽추’,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아르헨티나∙브라질의 ‘이과수 폭포’, 파타고니아의 ‘모레노 빙하’ 등 남미에는 자연이 빚은 역작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 남미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람’때문입니다. 남미 사람들은 정말 열정적입니다.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제 속에만 담아두기 힘든 탓일까요? 그들의 열정은 늘 밖을 향합니다. 그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그 열정에 ‘감염’돼 덩달아 신이 납니다.

 


                                                                      <볼리비아 소금사막>

북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맹주는 역시 미국입니다. 사실 한 대륙의 실세로만 묶어 두기에 이 나라의 존재감은 버거우리만큼 큽니다. 세계 최강대국이란 수식어가 적합하겠죠.

이 거대한 나라를 여행하는 내내 저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 어지러움의 실체는 다름 아닌 ‘모순’이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늘 자랑스러워하는 자본주의, 지유민주주의, 인권 등 보편적가치의 모순입니다.

연중 불야성을 이루는 라스베이거스, 세계금융의 심장부 뉴욕, 그리고 디즈니랜드∙유니버셜스튜디오 등 ‘유희산업’의 끝을 보여주는 로스엔젤리스…, 역시 미국은 자본주의의 상징입니다. 반면 화려한 네온 뒤편에 어김없이 수많은 부랑자와 노숙자가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함께 ‘유령도시’로 변한 디트로이트에선 자본의 잔인함을 목격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떤가요? 9∙11의 참상을 드러낸 ‘그라운드제로’에서, 이라크 전쟁의 전사자를 추모하던 보스턴 ‘자유의 길’에서 저는 미국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이 가치가 때로는 불순한 의도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낍니다.

                                                                                      <뉴욕 맨하튼>

                                                          <보스톤 이라크전 희생자 묘역>


유럽
유럽에 발을 딛기도 전에 저는 이미 지구촌 곳곳에서 ‘유럽스러움’을 한껏 경험했습니다.

과거 제국주의의 망령이 세계를 옥죄던 때 유럽은 전 대륙을 ‘자기복제’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동서로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은 오죽하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을까요. 지금도 홍콩과 인도,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영국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남미 모든 나라는 언어부터 문화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쌍생아와 다름없습니다. 남아프리카에는 독일어 간판이 즐비합니다.

유럽 패권주의는 하나같이 원주민을 억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말살했습니다. 폭정이 할퀴고 간 자리엔 강자의 ‘무자비’와 약자의 ‘신음’만 덩그렇습니다.

반감 탓인지 유럽 여행을 하는 내내 제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제 글에서 ‘유럽의 낭만’을 찾기 힘든 까닭입니다.

                                                                  <그리스 아테네>



아프리카
 “세계일주? 그럼 아프리카도 다녀 온 거야?”

한국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묻습니다. 다른 대륙은 그러려니 하나봅니다. 꼭 아프리카만 따로 떼어 이리 확인하려 듭니다. 사람들이 검은 대륙을 ‘미지의 땅’으로 여긴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아, 프, 리, 카”, 이 넉자를 되 내일 때면 서로 다른 감정이 솟아납니다.

오랜 식민지로 말미암아 ‘홀로서기’가 서툰 검은 대륙은 기아와 질병, 내전까지 더해져 지구촌에서 발전 속도가 가장 더딥니다. 문명과 거리를 둔만큼 소심한 여행자에게 이곳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반면 수 천 종의 동식물이 천연 그대로 보존된 생태계, 디지털 세상 속 아날로그 삶을 사는 아프리카 원주민 등 오직 아프리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인류∙생태학의 가치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듯 벅차오릅니다.

미지의 대륙을 향한 이 상반된 감정은 묘한 설렘을 불러일으킵니다.

                                                             <남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막>

오세아니아
태평양 남쪽에 오도카니 자리한 섬나라 호주와 뉴질랜드. 이들을 포함한 오세아니아 대륙을 이야기할 때 자연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호주에서는 자동차로 종단을 했습니다. 멜버른을 출발해 캔버라, 시드니, 골드코스트를 거쳐 브리즈번에 이르는 동안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앞에 절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밤중 원시림을 달리다 한편에 차를 세운 채 쏟아지던 별무리를 올려다보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청정국가인 뉴질랜드가 품은 자연은 좀 더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을 줍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서 한가로이 풀 뜯는 양 떼를 보고 있자면 ‘디지털 놀음’에 지친 마음이 절로 치유되는 것 같습니다.

오세아니아 여행은 다채로운 자연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호주 도로를 달리다 ‘로드 킬’의 참상을 목격, 개발만능주의의 폐해를 되새깁니다, 호주 사회에 자리 잡은 한인들을 통해 대한민국 청년의 현주소를 가늠하고 이를 통해 자기성찰과 반성을 해봅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문화의 다양성이 얼마나 소중한지 상기시켜 줍니다.

                                           <뉴질랜드 로토루아의 마오리족 마을>
Posted by 탄타로스
비보를 접한 지금 가슴이 먹먹합니다.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중국 공안의 무차별 폭력으로 156명이 목숨을 잃었다지요. 신장위구르는 티베트와 더불어 중국의 강제 병합 아래 신음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지난해 4월 중국여행을 하던 중 위구르 전통공연단을 만났더랬습니다. 하룻밤 만에 우리는 허물없는 사이가 됐습니다. 
2008년 4월의 그 밤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실크로드 사막 초입에서 그들은 내게 말했습니다. 한족동화정책에 맞서 그들 고유의 문화를 지키겠다고. 공안의 무자비한 탄압이 난무하는 영상을 보던 중 그 결연했던 눈빛이 떠올라 명치 끝이 아립니다. 
내 친구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중국 대도시를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실크로드의 발원지 시안, 다시 하루를 내달려 당도한 실크로드 관문인 둔황. 두 도시에서 나는 과거 카라반이 이룩한 영화와 함께 '승자 독식'의 패권주의를 보았다.


우리가 비단길이라 배워온 실크로드는 과거 동·서양의 상업, 문화, 교통의 교역로다. 한나라 때 수도 장안(현재 시안)을 떠나 서역길에 오른 여행가 장건이 실크로드의 기틀을 마련한 이후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양의 로마까지 동서양의 교류가 꽃을 피우게 됐다.


둔황은 중국 쪽에선 실크로드의 출발지, 반대로 서역 쪽에선 종착지 역할을 하는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다. 실크로드 한가운데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카라반의 목숨을 위협하는 장애물. 따라서 사막을 건너려는 자와 건너온 자 모두에게 실크로드의 관문인 둔황은 각별하다.


자신들의 안위를 신께 의지하려 곳곳에 지은 종교 사원, 각 민족의 언어로 쓰인 경전과 고문서 등은 둔황의 역사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그 중 불교 석굴의 백미로 꼽히는 '막고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인류의 자산이다. 이처럼 동·서양 문화가 맞닿은 실크로드, 그 이면에는 씁쓸하게도 '힘의 논리'가 만연해 있다.


우선 '실크로드'라는 용어부터가 그렇다. 당시 이 길을 통해 서방은 비단을, 동방은 보석과 직물을 주로 수입했다. '비단길'이란 이름 자체가 서방이 필요로 하는 품목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힘의 논리'는 청나라 시절 극에 달한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1900년대 초 서구열강은 청나라를 무력으로 개방한 후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을 감행한다. 실크로드의 관문인 둔황부터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이르기까지 수천 점의 문화재가 서방으로 흘러간 것이다.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분노는 대단했다. 둔황 막고굴을 관람할 때 일이다. 중국 현지인들과 함께 각 석굴을 돌아보던 중 한 지점에서 중국인 가이드가 입에 거품을 문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20세기 초 실크로드의 문화재 약탈 현황이 적힌 기록물. 그곳에는 당시 유물을 반출한 서구 탐험가들의 사진과 약력, 빼돌린 유물 개수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함께 여행 중이던 일본인 친구 히로(25·교사)가 부연 설명을 해줬다. (당시 나는 역사 과목을 가르치다 여행에 나선 일본인 교사와 친분을 쌓았다.) 그는 "문화재 반출에 대한 중국인의 분노는 무서울 정도다. 앞으로 중국이 더 성장한다면,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그들의 문화재를 모두 되찾아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해되는 대목이다. 어느 민족이건 자신들의 문화재가 약탈당한 것에 분노할 당연한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과연 중국은 순수하게 역사의 피해자일까'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실크로드가 낳은 인류의 문화유산은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로 갈수록 그 빛을 발한다. 티베트와 함께 중국 내 독립을 원하는 대표적인 소수민족인 위구르인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한 문화유산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한족을 어떻게 바라볼까.


역사적 배경에서 그 답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에 속하지 않았다. 한 무제 때 잠시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했다. 따라서 언어도 종교도, 생활방식도 중국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중국은 한 무제 때 이 지역을 지배한 전력을 바탕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논리라면 같은 시기 한 무제에 멸망한 고조선을 근거로 한국도 중국 땅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상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다.)


둔황 숙소에서 만난 위구르인은 중국과 소수민족 간의 이러한 이질감을 생생히 전해줬다. 한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 왁자지껄한 소리가 인도하는 곳에서 나는 위구르 전통음악 공연단과 인연을 맺었다.


위구르 전통복장을 걸치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위구르어로 대화하던 그들은 나에게 찬란했던 고창고성(중국지배 전의 투르판 일대의 왕국)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영어, 위구르어, 한국어 그리고 손·발짓과 필담이 어우러진 대화였다.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분명했다. 위구르인과 중국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자신들 고유의 문화와 가치를 중국인이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


'강자는 약자의 것을, 약자는 더 약한 자의 것을…', 찬란한 고대문명을 낳은 실크로드에서 나는 그 이면을 분명히 목격했다.


 

 

Posted by 탄타로스
 

외국을 여행하다 한국인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국의 낯선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혼자 방황하던 ‘나 홀로 여행자’라면 내 나라 사람을 마주하는 기쁨은 배가된다. 아직 한국 여행자가 많지 않은 남미나 아프리카 등 오지에서 한국인끼리 만날 경우 옷깃이 스치는 순간 호형호제 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일단 통성명이 끝나면 한국 배낭족들은 그간 여행하며 겪은 설움을 토로하고 맞장구치며 서로를 위로한다. ‘외국어 울렁증’ 탓에 단내 날 정도로 닫혀 있던 입들은 쉴 새 없이 한국어를 쏟아낸다.


이야기 도중에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아무개 씨들이 있다.

“내가 어디를 여행하다, 무슨 실수를 했는데 너무 창피했다. 외국인들이 다 쳐다보는 통에 ‘쓰미마생’하고 일본인인 척 했다.”

“나도 여행 중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쳐다보는 현지인들에게 ‘니하오’하고 중국인인 척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농 섞인 얘길 터. 면 팔릴 일이 있을 땐 겉모습만 보고는 한중일 삼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일본인 혹은 중국인 행세를 하는 게 애국하는 길이란 우스갯소리다.


얘길 듣다보면 문득 궁금증이 밀려온다. 여행자들이 종종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실수를 한다는 말인 즉 배낭족에게도 분명 지켜야할 윤리가 있다는 것. 도대체 여행자 윤리란 뭘까? 그 나라의 법과 관습 지키기, 유적지나 유물 훼손하지 않기, 나와 다른 종교 존중하기, 뭐 이런 것들이 되지 싶다.


위에 언급한 윤리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식상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촌 곳곳의 문화 ‘엿보기’가 일상화된 지금, 대부분의 배낭족들은 이런 윤리들을 잘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굉장히 중요함에도 대부분의 여행자가 당연한 듯 무시하는 윤리가 있다. 선입견으로 얼룩진 눈으로 타 민족을 재단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지구촌에는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이 너무도 많다. 문명과 담을 쌓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자면, 가슴 한편이 찌릿하다. 인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목격한 삶의 현장은 처절했다. 수년째 이어진 가뭄으로 물이 부족한 탓에 사람들은 고육지책으로 우물 바닥에 고인 썩은 물을 펐다. 수도공급은 꿈같은 일이다. 수인성 전염병으로 아이들의 손발은 곪아터졌다. 마을에선 문명화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소달구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많은 이들이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신발을 신은 이를 찾기 힘들다. 거리 한편에 거적을 깔고 자는 이가 지천이다.


남아메리카는 어떤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의 개발도상국에는 빈민가가 참 많다. 거리를 걷다보면 마약을 들이밀거나 성을 파는 이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불안정한 통화 탓에 은행에서 환전하는 것보다 거리의 불법 환전이 유리한 나라가 다수다. 빈곤함은 공직자의 부정을 부추긴다.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부패한 경찰, 이유 없이 짐 검사를 반복하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던 그들을 떠올리면 두고두고 입맛이 쓰다. 에콰도르에서 만난 잉카후예들은 하나같이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미비아로 넘어가는 도로가엔 차를 얻어 타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흡사 피난을 떠나는 난민의 모습이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역 주변에선 노상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 없는 추레한 배낭여행자도 그들 눈에는 ‘배부른 돼지’로 보인다. 돈이 없던 나는 그날 맨발신세를 면치 못했다. 네팔 어디쯤에서 산 값싼 신발을 그들은 감지덕지하며 벗겨갔다. 그나마 아프리카에서 잘 산다는 남아공이 이렇다.


이처럼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는 배낭족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들은 왜 이토록 가난할까?”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때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여행자는 없다. 우리는(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행자) 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그들 문화에서 비롯된 기질과 연관시킨다. 이런 판단은 객관적 근거보다는 미디어나 책 등 타자로부터 주입된 선입견을 바탕으로 한다.


예컨대 인도가 가난한 이유를 우리는 그들 삶을 관통하는 힌두교 떄문이라고 단정 짓는 경향이 있다. 카스트제도라든가 미신적 요소가 짙은 종교의 특성이 인도 경제를 후진적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남미의 후진성을 탓할 때는 흔히들 놀기 좋아하는 ‘한량 기질’에 혐의를 둔다. 내일에 대한 계획이나 투자 없이 그저 오늘 하루를 즐기는데 혈안이 된 호모 루덴스(유희인간)적 유전자가 발전을 저해한다고 재단한다. 아프리카의 경우 선천적으로 게으른 국민성이 빈곤함을 벗지 못하는 이유라고 속단한다.


이런 선입견은 오래도록 지구촌 패권을 장악해온 서구에서 비롯됐다. 17, 18세기에 걸쳐 세계지도를 펴놓고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며 개발도상국들을 식민화했던 유럽 열강의 시각인 것이다. '문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주장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장하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문화주의의 한계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강대국이 제도화한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파헤친 이 책에서 장 교수는 ‘9장 게으른 일본인과 도둑질 잘하는 독일인’을 통해 문화주의와 경제발전의 필연성을 경계하고 있다.


장 교수는 “문화는 변화한다. 많은 문화주의자들이 은연중 전제하는 것처럼 문화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며 “경제 발전에 확실하게 좋거나 나쁜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독일과 일본, 한국 등을 예로 들고 있다. 19세기 중반 독일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 있기 전 영국인들은 독인인을 ‘둔하고 굼뜨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로 정의 내렸다. 또 일본이나 한국 역시 유교라는 전근대적인 사상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지금의 평가는 어떤가? 둔하고 굼뜨고 정직하지 못하다던 독인인들은 철두철미하고 차분한 민족으로 변모해 있다. 전근대적 사상으로 경제발전에 걸림돌이라던 동아시아의 유교는 오히려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가치들을 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 마디로 이들 나라의 경제발전을 전후로 해 문화주의자의 평가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는 얘기다. 이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장 교수는 개발도상국의 후진성은 온전히 문화적 기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열악했던 경제환경이 안고 있는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경제 환경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면 해당 국가 사람들의 기질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장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지금 개발도상국들이 처한 열악한 경제환경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따지는 일이 가난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언급했듯 개발도상국 대부분은 서구열강, 정확히 유럽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의 착취는 오랜 시간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자립을 방해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후진성이 그들의 기질 탓이라는 가해자의 주장은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려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개발도상국의 가난을 문화적 기질 탓으로 여기는 것은 가해자인 서구 열강의 ‘책임회피’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며, 피해자인 개발도상국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여행자의 시각이 흐려질 때 한 사회가 처한 현실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행자에게도 지켜야할 윤리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탄타로스

 

                                                                            <인도 델리의 만수>

흔히들 한류(韓流)의 무대하면 중국, 대만,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만을 떠올린다. 용어 자체가 이 지역에 불어 닥친 한국 대중문화 열풍에서 비롯됐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부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류가 세계 곳곳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넘실거리고 있단 얘기다. 지난 1년의 여정을 통해 느낀 바, 한류는 동아시아를 넘어 맹렬히 서진 중이다. 인도를 거쳐 중동 모래바람을 타고 유라시아의 가교 터키까지. 이 뿐이랴. 이집트를 거점으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 초입에 상륙한 한류의 기세는 등등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한류에 대한 개념 확장이 필요하다. 서쪽의 한류는 동쪽의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한류가 가수와 배우 등 한국 연예인의 인기를 바탕으로 한 ‘대중문화 열풍’을 의미한다면, 서진 중인 한류는 한국 여행자를 겨냥한 현지인의 ‘마케팅 열풍’을 의미한다. 동 한류가 한국 문화의 해외진출로 이뤄진 인위적인 현상이라면, 서 한류는 한국 여행자의 객심(客心)을 잡으려 현지인이 일으킨 자발적 현상이다.


먼저 인도를 보자.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자신을 ‘만수’라 소개하는 현지인을 많이 만나게 된다. 델리, 아그라, 카주라호, 바라나시 등 한국인 여행자가 몰리는 도시에는 어김없이 만수가 넘쳐난다. ‘왜?’, ‘언제?’, ‘어떻게?’ 만수라는 예명이 쓰이기 시작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추측은 가능하다. 한국인을 상대하던 인도 관광업 종사자에게 누군가 푸근한 이미지의 만수라는 별칭을 붙여줬을 테고, 덕분에 그는 한국 여행자 사이에 유명인사가 됐으리라. 이에 수천 킬로 떨어진 도시까지 ‘만수 마케팅’이 퍼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수도 뉴델리의 여행자 거리인 빠하르간즈 골목에 조그만 상점이 있다. 이 가게의 주인 역시 만수다. 입구에 ‘만수네 짜이집’이라는 한글 간판이 떡하니 걸려있다. 만수는 한국인의 정서를 간파하고 있다. ‘에누리’는 기본이요, ‘덤’을 제공하고 ‘애프터서비스’도 확실히 해준다. 나이에 상관없이 남자에겐 ‘형’, 여자에겐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 친근함을 더한다. 어설픈 한국말로 농담도 곧 잘한다. 이러니 한국 여행자들은 거리가 멀더라도 웬만하면 ‘만수네 짜이집’을 찾는다. 만수의 성공에 자극받은 주변 상점들이 하나 둘 한글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만수의 아성을 쫒기에 힘이 부쳐 보인다.


힌두교 성지인 바라나시의 만수는 어떤가. 강가(갠지스강)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조각배를 태워주는 만수 역시 자칭 지한파다. 동틀 무렵과 해질녘 강가의 신성한 일출∙일몰을 보려 강어귀로 나오면 어김없이 수 십 명의 조각배 호객꾼들이 붙는다. 서로들 자신의 배를 타라고 아우성이다. 어지러이 날아드는 영어와 인도어 사이에, “나 만수에요. 만수배 타요”하는 다소 어눌한 발음의 한국말이 들려온다. 만수다. 타국에서 그것도 현지인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우리말이 그저 신기하고 정겹다. 왠지 모를 신뢰감에 호객꾼을 비집고 만수 배에 오르게 된다.


한국 여행자의 객심을 잡는 보증수표인 만큼 인도의 관광업 종사자들은 너도 나도 만수로 개명(?)하고 있다. 자연히 만수들 사이에선 진위 논란이 한창이다. 서로 자신이 원조라 주장하는가 하면, 상대가 짝퉁이라며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바라나시 만수가 카주라호 만수와 ‘맞장’ 떴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 뼈 속까지 만수가 되기 위해 이들은 우리말을 독학하고 한국 문화와 정서를 배우려 노력한다. 자발적으로 한류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인도에 만수가 있다면 중동에는 지한파로 통하는 ‘한류 4대 천왕’이 있다. 이집트(지리상 북아프리카지만, 아랍국가란 특성상 중동으로 분류)의 ‘만도’와 요르단의 ‘지단’, 시리아의 ‘압둘라’, 터키의 ‘헥토르’가 그들이다.


이집트의 만도는 ‘4대 천왕’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파라오의 무덤 ‘왕가의 계곡’으로 유명한 룩소르에서 만도는 다양한 일을 한다. 요식업과 숙박업, 투어가이드 등 굵직한 일을 비롯해 기차표 예약이나 물품구입 등 여행객 편의를 위한 자질구레한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물론 그의 손님은 모두 한국 여행자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룩소르의 모든 길은 만도로 통한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독학했다고는 믿기 힘들만큼 훌륭한 한국어 실력과 한식 요리솜씨는 그가 한국인의 마음을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방증한다.


시리아 하마의 숙박업소에서 매니저 일을 하는 압둘라 역시 한국인 여행자 사이에서 유명하다. 한국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그는 사람 됨됨이 하나로 객심을 사로잡은 경우다. 먼저 요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손님 뒤치다꺼리에 여념 없는 그는 ‘손님이 왕’이어야 하는 한국정서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다. 요르단 와디럼 사막투어의 지단과 터키 페티에의 헥토르 역시 그들만의 노하우로 한국 여행자를 섭렵하고 있다.


지구촌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본 결과, 이렇듯 특정 국가의 여행자를 겨냥한 마케팅의 대상은 한국이 유일하다. 우리 보다 훨씬 오랜 세월 여행 인프라를 구축해온 유럽이나 북미, 일본을 상대로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현지인을 본 적이 없다.


왜 일까? 나름 고심 끝에 결론을 냈다. 한국은 해외여행의 족쇄가 풀린 지 올해로 고작 20년이다. 허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선진국에 수 십 년이나 뒤졌지만, 한국의 해외여행자 수는 단 기간 내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여행자는 넘쳐나건만, 이미 여행 노하우가 쌓인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여행 정보는 빈약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인 여행자의 여행 경로는 경험자의 수기에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앞서 여행한 이가 ‘이집트 룩소르에 갔더니 만도라는 사람이 알아서 해주더라’는 정보를 주면, 많은 이들이 같은 방법으로 여행을 한다는 얘기다. 현지 관광업 종사자들에게 한국 여행자는 무주공산이자, ‘무진장(無盡藏)의 곳집’인 셈이다.




Posted by 탄타로스
여행이 끝났습니다. 지난해 4월 14일 오후 2시 홍콩행 비행기를 탔더랬지요. 이달 14일 오후 4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으니, 정확히 365일하고 2시간이 흘러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365일은 공전 주기라지요. 태양 둘레를 한 바퀴 돌던 지구를 따라 저 역시 그 '푸른 별' 안에서 공전을 한 셈입니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미,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순으로 6대륙, 30개국, 135개 도시에서 발품을 팔았습니다.

아프리카 남아공의 한 초원에서.


여행이 끝났습니다. 일상생활 틈틈이 저는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침에 눈 뜰 때 푹신한 침대와 상쾌한 향의 이불이 낯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혼자라는 사실이 마냥 신기합니다.

주머니 사정 상 여행 내내 예닐곱 명이 함께 생활하는 값싼 기숙사형 숙소에서 자야했습니다. 아마 거기에 길들여진 탓이겠죠.

끼니때도 마찬가집니다. 김치 한 접시로도 밥을 거뜬히 비웁니다. 빵 조각으로 연명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성찬입니다. 허리춤을 옭아매던 '복대'(귀중품 보관을 위해 바지 안에 차도록 만들어진 지갑)도, 자물쇠를 채운 무거운 배낭도 필요 없습니다. 더는 길 위에서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속으로 되뇝니다. '아! 진짜 여행이 끝났구나. 여긴 한국이구나'하고 말입니다.

세상에 눈뜨려 6대륙 30개국 135개 도시서 발품
여행은 채우고 비우는 과정…좋은 기억만 남아


여행이 끝났습니다. 마냥 좋을 줄 알았습니다. 여행 말미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렸기에 더욱 그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흔 시간 동안 꼬박 기차를 탄 후 지독하게 몸살을 앓았던 중국에서, 피 같은 여행경비를 사기당한 인도에서, 발톱이 빠져 죽을 거 같이 아픈 채로 올라섰던 히말라야에서, 한밤중 숙소를 찾아 낯선 골목을 헤매던 콜롬비아에서,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에 숨 쉬기조차 버거웠던 중동의 사막에서, 먹을거리가 없어 주린 배를 부여잡아야 했던 쿠바에서, 밤새 모기에 뜯긴 채 혹여나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던 아프리카 초원에서, 저는 늘 집 생각을 했습니다.

멋쩍고 객쩍은 고백이지만 10kg이 빠져 수척해진 모습을 거울 속에서 마주하고는 펑펑 운 적도 있습니다. 약비나도록 여행했으니 당분간은 꼼짝 안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돌아온 지 열흘 만에 좀이 쑤십니다. 떠나 간 곳에서는 제자리를 그리더니, 이제는 제자리에서 떠나갔던 곳을 그리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짙게 밴 이 역마살을 어찌하리오.

아프리카 나미비아 모래언덕 듄45에서.


여행이 끝났습니다. 끝나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엇을 보고 배우느라 그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했느냐고. 질문 앞에서 번번이 말문이 막힙니다.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단숨에 토해내기에 벅찹니다. 어쩌면 혼란스러워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십 수 년 동안 3자로부터 주입돼 제 속에서 굳어진 것들이 당사자 앞에서 무너져 내리길 반복했으니까요.

제 눈은 보았습니다. 서구사관에 익숙한 탓에 편견 일색이던 이슬람국가를 '달리' 보았습니다. 식민지배의 아픔이 남아있는 개발도상국의 현실을 '바로' 보았습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정체성을 지키려 투쟁하는 소수민족을 '아프게' 보았습니다. 어디 이뿐일까요. 역사는 참으로 약자에게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제 스스로에게 물을 차례입니다. 저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여행 떠나기 전 다짐했었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비우고, 또 채워오겠다고. 내 안에 쌓인 낡고 묵은 것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참신한 가치들을 담아 오겠다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부끄러워 낯빛이 빨개집니다. 깜냥 부족한 저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여행만 다녀오면 시야가 탁 트이고, 대번에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다행입니다. 제가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 지를 깨달았으니까요. 살면서 청산해야 할 빚이자,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아시아 네팔 히말라야에서.



남미 볼리비아 소금사막


여행이 끝났습니다. 아닙니다.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세계일주보다 훨씬 길고 긴 인생 여정이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인생 여정에서 느낄 고단함은 지난 1년 동안 길 위에서 감내해야 했던 그것보다 훨씬 클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세계일주를 끝낸 지금 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좋은 기억만 가득합니다. 힘들었던 순간조차 술자리 안줏거리로 거듭납니다. 인생여정도 다르지 않겠지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후에 웃으며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겠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날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날이 올 테죠.


여행이 끝났습니다.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장도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독자여러분의 응원과 질책이 힘이 됐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기꺼이 지면을 허락한 <경남도민일보> 덕에 여행을 좀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 함께 여행했던 동지들, 한국에서 안위를 걱정해준 친구들, 선·후배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가족들,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아닙니다.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세계일주보다 훨씬 길고 긴 인생 여정이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인생 여정에서 느낄 고단함은 지난 1년 동안 길 위에서 감내해야 했던 그것보다 훨씬 클지 모릅니다.  -윤유빈
Posted by 탄타로스

녀석은 용의주도하다. 수풀에 바짝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는다. 바람결에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지 어쩌다 코를 킁킁거릴 뿐이다.

우리 역시 신중하긴 마찬가지. 녀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차량 옆 창문에 붙은 마흔 네 개의 눈동자는 깜박거림조차 잊은 채 한 곳을 향해 있다. 숨소리마저 죄악이다. 지독하게 고요하다.

30분째다. 아이 키 만 한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금수의 왕' 사자와 '영장류의 최상층부' 사람 간의 기 싸움이 팽팽하다. 전선은 2m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 형성돼 있다. 지구력이 관건이다. 녀석은 우리가 떠나길, 우리는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느 한 쪽은 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남부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동물서식지인 나미비아 에토샤 국립공원에 온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동물을 봤다. 영화 <마라톤>의 주인공 초원이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얼룩말을 비롯해 기린, 톰슨가젤, 임팔라, 스프링복, 타조, 자칼, 오릭스, 야생멧돼지, 독수리, 하이에나 등이 에토샤를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얼룩말 부부의 사랑.


그네들은 우리를 열광시켰다. 끝 간 데 없이 너른 초원을 달리다 물웅덩이에서 자맥질을 하는 야생동물을 발견할 때마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동물을 소재로 한 영상물이야 인간의 입맛대로 가공되기 일쑤지만 이곳엔 꾸밈이 없다. 동물원 철장 속 금수에게 채워진 속박의 굴레도 없다. 모든 게 진짜다. 어떤 종류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이유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에토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모두의 마음이 뒤숭숭하다.

뒷간에서 일 처리를 확실히 못한 것처럼 뒤가 개운치 않다. 아직 사자를 못 본 탓이다.

사파리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맹금류를 호령하는 사자를 마주하는 일일게다. 주로 밤에 사냥하는 사자는 웬만해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경계심 많은 녀석이 사파리가 이뤄지는 새벽이나 낮 시간대에 수풀이나 나무 둥치에 몸을 숨기기 때문.

남부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에토샤 국립공원은 수많은 동물들의 터전이다.

탐사 팀은 에토샤를 떠나기 직전 행한 마지막 사파리에 기대를 걸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사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끝나는 시간이 다가올 즈음 팀장 가이드 타바니가 입을 뗐다. 목소리에 힘이 없다.

"이번 탐사에선 사자를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에게 운이 따르지 않는 모양…."

"사자다!"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누군가 소리쳤다. 이목이 집중됐다. 먼발치 수풀 사이로 샛노란 갈기가 흩날린다. 수사자다. 캠핑차 안이 술렁였다. 타바니가 모두에게 주의를 준다. 극도로 민감한 사자를 자극하지 말란다. 이내 차 안에 정적이 감돈다. 우리를 태운 마릴린은 조용히 사자에게 다가갔다. 첫 대면이다. 하지만 녀석은 쉽사리 그 자태를 내보이지 않았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도무지 승패가 나지 않을 것 같던 기 싸움에 변화가 일었다. 사자 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뒤척이던 녀석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우렁차게 포효한다.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차량 안이 다시 떠들썩하다. 스무여 대의 카메라가 사자를 정조준한다.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래도록 수풀에 숨어있던 수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온킹'의 심바처럼 위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린 녀석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영화 <라이온킹>의 주인공 심바를 닮았기에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녀석은 바위산 꼭대기에 올라 동물들을 굽어보던 영화 속 심바의 위엄을 지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심바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고리모양의 눈과 얼굴을 뒤덮은 갈기가 강한 인상을 풍겼다. 마릴린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녀석은 풀숲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주위에 있던 초식동물들이 놀라 사방팔방으로 뛴다.

모두들 역동적인 사냥 장면을 기대하며 숨을 죽였다. 하지만 심바는 달아나는 임팔라 무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심바는 지금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젯밤 사냥에서 고기를 섭취한 모양이지요. 이곳 야생에선 결코 쓸데없이 사냥하는 일이 없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얻고 더 이상은 욕심내지 않지요."

가이드의 말이다.

에토샤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들른 힘바부족의 사람들.

우리는 숲 속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심바의 흔적을 좇았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에토샤를 떠날 수 있었다. 심바를 마주한 까닭에 예정보다 늦게 국립공원을 빠져나왔다. 지평선 너머 지는 해가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초원은 검은 융단을 덮어 놓은 것처럼 어두웠다. 상념에 잠기기에 분위기가 그만이다.

나는 심바를 떠올렸다. 딱 필요한 만큼만 사냥을 한다는, 그 이상은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녀석을 말이다. 어쩐지 그의 포효가 호통처럼 느껴졌다. 덕지덕지 욕심이 들어찬 내 마음을 녀석은 알고 있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아프리카 초원 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부끄러워 빨개진 낯빛을 가려줄 만큼 충분히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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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멀리서 그녀가 다가온다. 이름에서 풍기는 요염한 이미지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육중한 몸이 꽤 듬직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 차례 굉음과 함께 그녀가 멈춰 섰다. 마릴린은 우리를 오지로 이끌 캠핑차다.

안전과 직결된 주요 임무를 띤 만큼 구성원 모두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이름을 지어준 이유다.

사막과 바다가 공존하는 스왑콥문트. 산악 오토바이로 사막을 횡단하자,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트럭킹'을 통해 본격적으로 남부아프리카 나미비아 여행에 나섰다. 트럭킹(Trucking)이란, 트럭을 개조해 만든 캠핑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종·횡단하는 것을 뜻한다. 텐트 한 동에 의지해 잠을 자고, 직접 끼니를 지어먹는 야영생활이 어떨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수천 종의 동식물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보고, 문명을 등진 채 살아가는 원주민,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사막과 초원 등 가공되지 않은 자연 속에 몸을 내맡기는 일은 분명 짜릿한 경험이다. 이런 까닭에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아프리카로 몰려들고 있다.

8개국 여행자 22명 일주일간 나미비아 '트럭킹'

우리 팀은 짐바브웨 출신 가이드 타바니를 중심으로 한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대만, 영국, 미국 등 8개국 22명으로 꾸려졌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끝내고 마릴린에 올랐다. 모두 말이 없다. 문화와 언어의 높다란 벽은 첫 만남의 어색함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미비아로 넘어가는 길목인 서더버그(Cederberg)에서 첫 야영을 시작했다. 텐트를 치는 일부터 밥 짓고 배식하는 일까지 낯설지 않은 게 없다. 그나마 군 생활을 마친 한국 젊은이 3인방의 손놀림이 가장 빠르다. 우리는 서둘러 텐트를 치고 외국 친구들을 도왔다.

8개국 22명의 젊은이로 구성된 오지 탐험 팀.


네덜란드에서 온 로즈가 물었다.

"너희는 야영생활을 많이 해봤나봐. 굉장히 익숙해 보이네."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서 지겹도록 텐트치고, 밥도 지어먹고 그래."

"군대? 다들 직업이 군인이야?"

"그런 게 아니고…"

로즈에게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외국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한국에 대해 잘 아는 대만인 인디가 중간 중간 부연 설명을 도왔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린다.

한번 풀어 헤쳐진 '이야기 보따리'는 닫힐 줄 몰랐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며 웃음꽃이 핀다. 어느새 악수를 청하고 어깨동무 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우리 앞의 벽은 그렇게 하나 둘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별 빛 아래서.

"내일은 새벽 일찌감치 출발해야 합니다. 늦어도 5시 30분까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릴린에 탑승해야 해요."

"어휴~"

팀장 가이드 타바니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출발시간에 맞추려면 적어도 새벽 4시 30분엔 일어나야했기 때문.

'듄45' 해돋이 장관·스왑콥문트 풍경에 넋 잃어

여정 닷새 째, 이번 트럭킹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듄(Dune)45'의 해돋이를 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두들 내일 펼쳐질 장관의 가치를 알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사막 모래언덕인 듄45.


듄45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 모래언덕이다. 벌건 해를 머금은 사구 앞에 서면, 경험 많은 사진작가들조차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그 모습이 경이롭단다.

"어이! 다들 일어나라고."

이른 새벽녘, 먼저 일어난 친구들이 텐트 사이를 오가며 잠에 취한 이들을 깨웠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여기저기서 손전등 빛이 어지러이 춤춘다. 마른 숨을 헐떡이던 마릴린이 힘겹게 엔진을 가동했다. 그녀 역시 장도에 지친 모양이다. 일제히 차에 올랐다. 피곤할 법도 한데, 다들 눈이 반짝인다. 마음들은 벌써 듄45를 오르고 있는 듯했다.

황량한 사막을 40분 남짓 달리자, 눈앞에 거대한 사구의 형체가 느껴졌다. 듄45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도한 녀석이다.

애타는 마음으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먼발치서 동이 터 올랐다. 벌건 빛이 모래언덕 한 쪽 면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반대편 경사면엔 검게 그림자가 졌다. 한 쪽은 빛을 받아 눈이 부실정도로 반짝이고, 다른 쪽은 칠흑처럼 어둡다. 선명한 색의 대비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듄45가 자리한 소쑤스플라이. 현지 가이드가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법을 설명하던 중 도마뱀을 잡아먹는 시늉을 하고 있다.

듄45의 감동을 뒤로한 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스왑콥문트(Swakopmund), 나미비아 휴양도시로 유명한 이곳은 사막과 바다가 공존하는 도시다. 메마른 사막 너머 일렁이는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사막 옆에 바다라니!

그 생경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사막을 횡단, 해안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쿼드바이크(Quad Bike)라 불리는 네 발 달린 산악용 오토바이를 빌렸다. 구불구불한 모래언덕을 넘어 사막 한 가운데를 달리자니, 그 옛날의 카라반이라도 된 기분이다. 낙타대신 성능 좋은 오토바이가 있고, 교역품을 싣는 대신 한 가득 모험심을 실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뜨거운 모래 바람에 숨이 막힐 즈음, 어디선가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풍겨왔다. 바다다. 진짜 사막 코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금방이라도 마른 땅을 적실 기세로 파도가 밀려든다.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사이 여정 일주일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Posted by 탄타로스

"믹스! 너 공사장에서 백인 본 적 있냐?"

"아니"

"그럼 주차요원 중에는? 아님 청소부, 경비원, 구걸하는 사람…, 아무튼 3D 업종 중에서."

"3D가 뭔데?"

"Dirty, Difficult, Dangerous에 해당하는 험한 일을 뜻하잖아."

"못 본 거 같은데."

"그렇지? 죄다 흑인이지. 왜 그럴까?"

"그야 흑인이 많으니까 그렇지. 남아공 인구의 80% 이상이 흑인이잖아. 신문사에서 일한 놈이 그것도 몰라?"

"근데 왜 호텔이나 레스토랑 사장, 좋은 차 주인은 몽땅 백인이지? 네 말대로 흑인이 다수면 그 중에 잘사는 사람도 많아야 하잖아?"

"유빈! 그게 뭐가 대수라고 발끈 하냐? 라디오 볼륨이나 높여봐. Bloody hell, bloody hell, blah blah…."

희망봉이 있는 케이프반도 끝자락. 이곳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난다.

애초 기대하지 않았지만, 녀석의 성의 없는 대답에 슬쩍 부아가 치밀었다. 케이프타운 숙소에서 만난 호주 청년 믹스. 동갑내기 그 역시 '나 홀로 여행자'다. 죽이 잘 맞았던지라 우리는 곧잘 함께 여행하곤 했다.

그 날은 차를 빌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 느낀 바, 구체적으로 '흑인과 백인의 관계'에 대해 백인인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영어 사전을 뒤적이며 준비했건만, 그와의 토론은 이렇듯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심통이 나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케이프타운에서 보냈던 지난날이 머리를 스쳤다.

일주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아래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그 즈음 내 심신 상태는 만신창이였다. 여행 끝자락의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중동과 이집트 여행에 쏟은 탓이다. 하필 마지막 여정지가 오지 중에 오지로 꼽히는 남부 아프리카라니. 무뎌진 여행자의 촉수는 벼린들 벼려질까나.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다. 근심과 걱정, 무기력 사이로 언뜻언뜻 다른 성격의 감정이 비친다. 딱 꼬집어 설명하긴 힘들지만, 일종의 설렘 같은 거다.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그런 감정 말이다. 이 복잡함의 실체는 뭔가.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아프리카'였다.

'아, 프, 리, 카', 이 넉자를 되뇔 때면 내 안에 서로 다른 감정이 충돌한다. 오랜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홀로서기'가 서툰 검은 대륙은 기아와 질병, 내전까지 더해져 지구촌에서 발전 속도가 가장 더디다. 문명과 거리를 둔 만큼 소심한 여행자에게 이곳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고운 모래로 유명한 캠스베이.

반면 수천 종의 동식물이 천연 그대로 보존된 생태계, 디지털 세상 속 아날로그 삶을 사는 아프리카 원주민 등 오직 아프리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인류·생태학의 가치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듯 벅차오른다.

양면의 감정을 끌어안은 채 발을 디딘 케이프타운은 남부 아프리카의 관문이다. 백인의 오랜 지배를 말해주듯 도처에 유럽 색채가 짙다.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본격적으로 남부 아프리카 여행을 시작할 계획이다. 각국 비자부터 교통편 마련까지 생각보다 준비할 사항이 많다. 뜻하지 않게 체류일이 길어진 김에, 나는 케이프타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년에 월드컵을 개최하는 남아공은 지금 축구 열기로 뜨겁다. 전역에서 경기장, 숙소 등 인프라를 다지는 일이 한창이다. 케이프타운 국제공항 청사에선 월드컵 성공개최를 염원하는 입간판이 제일 먼저 관광객을 맞는다. 도심 곳곳에서도 이런저런 월드컵 관련 공사가 분주하게 진행 중이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공사현장의 인부다. 뙤약볕 아래 마른땀을 흘리는 이들 중 백인은 없다. 하나같이 흑인이다. 물론 전체인구의 84%가 흑인인 까닭에, 그만큼 흑인노동자가 많을 확률이 높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성립하려면, 화이트칼라 집단에도 흑인이 많아야 하는데 이건 또 그렇지 않다. 마치 흑인과 백인 사이에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사현장의 인부나 주차요원, 식당종업원, 환경미화원, 사설경비원 등 이른바 3D업종 종사자는 어김없이 흑인인 반면 이들을 부리는 윗선은 죄다 백인이란 얘기다. 적어도 내가 본 현실은 한 번도 이 공식을 벗어난 적이 없다.

케이프 반도의 펭귄섬.


역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떠올릴 수밖에. 남아공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1994년 사이 유색인종을 합법적으로 옥죄기 위해 시행된 악법이다.

1652년 네덜란드계 동인도회사를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패권주의 야욕에 사로잡힌 서구인이 앞 다퉈 남아공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유색인종을 탄압했다. 그저 피부색이 다르다는 게 이유였다.

수 백 년 간 이어져 온 차별은 20세기 들어 아파르트헤이트란 이름으로 제도화됐다. 이 시기에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은 '참정권 부정', '이인종간 혼인금지', '거주이전의 제한' 등의 사슬에 묶여야 했다. 노예제도가 성행했던 '고릿적' 얘기가 아니다. 우주선이 은하계를 누비던 최근의 일이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폐기되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집권한 후 많은 이들이 희망에 들떴다. 그들의 바람처럼 분명 남아공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오후 6시면 집 밖 통행이 금지됐던 흑인들은 이제 밤늦도록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극소수지만 백인들의 전유물이던 고급주택에도 흑인 거주자가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애석하게도 변화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아직도 남아공에서 흑백의 역할과 지위는 분명한 경계선 하에 놓여있다. 360년 간 사회전반을 장악해온 악습이 15년 만에 근절되기란 힘든 일일 터.

테이블마운틴에서 바라본 케이프타운의 전경.


문제는 남아공의 변화를 저해하는 게 비단 시간 따위의 물리적 요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시기, 백인의 절반가량이 흑인 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남아공을 떠났다. 현재 거주하는 백인들은 특정 지역을 요새화, 여전히 그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악명 높던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를 명확하게 단죄하지 못한 것 역시 변화를 방해하는 요소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죄와 화합을 위한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헤이! 유빈!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이제 다 왔다고."

믹스가 퉁을 놓는 바람에 나는 회상의 장막을 걷어야 했다. 눈앞에 희망봉이 펼쳐져 있다.

희망봉(Cape of good hope), 15세기 포르투갈 항해자가 이곳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이름 붙였단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식민지 건설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거점이었다. 그들에겐 '희망'이었을지언정,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엔 '절망'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이다. 케이프 포인트에 올라 그들의 조우를 가만히 지켜본다. 두 바다는 소리 없이 몸을 섞는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물 색깔이나 지류의 배경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나 보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나누고, 국가의 배경을 따져가며 섞이지 못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입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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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쓰다보면 종종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쓸 만한 글감이 없거나, 반대로 거리가 넘쳐날 때 그렇다.

기나긴 여정으로 여행 자체가 일상이 돼버린 상황에서 1년 365일 매일이 특별할 순 없다. 팔자 좋게 빈둥거리거나, 혹은 며칠 씩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처럼 딱히 한 일이 없는 경우 마땅한 글 소재를 찾기 힘들다. 머리를 쥐어 짜 본들 글 한 단락 쓰는데 하 세월이다.

반면, 글감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이 얘길 담자니 저 얘기가 아쉽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이래저래 닥치는 대로 쓰다보면 배는 어느새 산으로 간다. 글에 두서가 없다. 횡설수설한 글이 되기 십상이다.

이집트는 어떤가? 후자에 속한다. 쓸 내용이 너무 많다. 이집트를 대표하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수도 카이로 근교의 기자 지구에 있다. 이걸 쓰자니 신전의 백미로 꼽히는 아스완 근교의 '아부심벨'이 걸린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유명한 룩소르 '왕가의 계곡' 역시 외면하기 힘들다. 망자의 저주로 알려진 '투탕카문의 황금마스크'도 아쉽다. '람세스 2세', '클레오파트라', '오벨리스크'도 있다. 모세가 십계를 받은 시나위 산은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의 성지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나일 강'도 써야겠다. 알렉산더 대왕의 흔적이 숨 쉬는 알렉산드리아가 빠지면 섭섭하다.

난감하다. 도무지 어느 것 하나 솎아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글감 모두를 조화롭게 버무릴 깜냥 또한 없다.

이집트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지러이 떠오르던 글감은 의외로 손쉽게 정리됐다. 여정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소재 하나가 '딱' 걸려든 것.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택된 글감은 고대 이집트 문명도, 알렉산더의 대제국도, 모세의 성지도 아닌 이집트인의 '바가지 상술'이다. 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집트의 널뛰는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집트에서 정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호텔, 음식점, 상점, 기차역, 버스터미널, 여행사 등 어디서 무얼 하건 흥정을 통해 값을 치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이집트인은 원래 가치보다 수십 배나 비싼 가격을 부르곤 한다. 어수룩하게 행동하다간 순식간에 여행경비가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람세스2세의 치적을 기린 아부심벨 신전


사실 바가지 상술은 이집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나 네팔,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 흔하게 겪는 일이다. 하지만 앞서 여행한 나라에서 기껏해야 정가보다 2~3배 정도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것과 달리 이집트에선 보통이 20배요, 많게는 80배에 달하는 바가지를 경험하곤 한다.

룩소르에서 유적지를 여행할 때 일이다. 한 손에 기념품을 든 장사치가 뒤따라오더니 물품을 건넨다. 돌로 만든 조각인데 괜찮아 보인다. 가격을 물어보니 400EP(EP는 이집트 화폐단위로 1EP가 우리 돈 300원에 해당)를 달란다. 손가락 크기만 한 돌조각이 우리 돈 12만 원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보여준 기념품의 적정 가격은 단돈 5EP였다. 무려 80배의 가격 상승이다.

기념품이야 안사면 그만이라지만 생필품의 경우엔 골치가 아프다. 한날 치약을 사러갔더니, 20EP를 부른다. 한 뼘 크기의 조그만 치약이었다. 이집트 물가를 감안할 때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치약의 원래 가격은 2EP에도 못 미쳤지만, 주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값을 속인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택시를 탈 때도 어김없이 가격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나일강을 누비는 무동력 돛단배 펠루카


이집트를 여행하기 전까지 흥정에도 나름의 묘미가 있다고 생각했더랬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현지인과 지갑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가난한 여행자, 둘 사이엔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실랑이 끝에 적정선의 타협이 이뤄지면 어김없이 악수와 포옹이 오간다. '어쨌든' 정가보다 더 받고 판 쪽이나, '그나마' 정가에 가까운 가격에 산 쪽이나 흡족해 하긴 마찬가지다.

여행자는 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무얼 하든 현지인보단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상 저들이 외국인을 상대로 많은 이문을 남기려 한다는 것을.

다행히 현지 물가가 저렴한 까닭에 어느 정도의 바가지 상술은 여행자에게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경우는 다르다. 정가와 판매가의 골이 천 길 낭떠러지만큼 깊다. 그 간극을 생각하면 흥정은 더 이상 '사람내음 풍기는 경제활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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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잔인하다. 대상을 생각의 틀에 가둔 채, 멋대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자, 특히 언론처럼 공신력 있는 기관을 맹신할 경우 편견의 벽은 더욱 견고해 진다.

한 번 굳어진 편견은 좀체 무너지지 않는다. 마치 딱딱한 껍데기에 쌓인 견과류 같다. 그 외벽을 깨기 위해선 커다란 충격이 필요하다. '망치'로 호두 껍데기를 두드리듯, '경험'이란 공이로 힘차게 두드려야 한다.

돌이켜 보면, 시리아 여행은 내 머릿속 호두 껍데기를 부수는 과정이었다.

마을 어귀의 모습이 우리나라 70~80년대 시절을 연상케 한다.



'악의 축' 선입견으로 시작한 여행
현지인의 따뜻한 마음 몸으로 느껴

서구 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이를 여과 없이 전하는 국내언론에 익숙한 탓에 시리아 여행을 앞두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악의 축', '불량국가', '인권 사각 지대' 등 타자로부터 주입된 살벌한 이미지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터키의 국경도시 안타키야에서 육로를 통해 시리아 측 알레포로 넘어오는 내내 흉흉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끌려가 개종을 강요당하거나,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당한 후 갖은 고문에 시달리는 처지에 놓이곤 했다.

머리를 흔들어 도리질 쳐보지만, 망상은 쉬 물러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리아 국경을 통과한 버스가 길 한 편에 정차하고 있었다. 곧 차장이 낯선 아랍어로 뭐라 뭐라 소리친다. 사람들이 짐을 꾸리더니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현지인만 가득한 탓에 영어가 통하질 않았다.

상황으로 짐작건대 여기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라는 말인 듯 했다. 다른 이들의 꽁무니를 쫓아 밖으로 나오자, 황토 빛 중동 풍경이 시선을압도했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만난 아이들은 해맑은 미소로 이방인을 환대했다.


간이 정류소엔 변변한 의자 하나 없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기약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지평선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는데,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운전자가 차에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덜컥 겁이 나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무안한 듯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두 번째는 트럭이다. 여지없이 나는 험한 인상으로 손사래를 쳤다.

얼룩진 창으론 풍경을 볼 수 없어

버스를 기다리는 30분 동안 스무 대가량의 차를 상대로 같은 일을 반복했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이 낯선 이방인을 도우려 했다는 사실을. 저물녘 허허벌판을 서성이는 내게 대가없이 차편을 제공하려던 것을. 괜한 의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국경에서 마주한 시리아인의 호의는 시작에 불과했다. 알레포와 하마,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나는 현지인의 따뜻한 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시리아 중부 도시 하마의 풍경.

국경도시 알레포에 자리한 모스크.


하마에선 단 한 번도 버스나 택시를 이용한 적이 없다. 손짓만 하면 지나가던 차량이 멈춰 선다. 같은 방향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를 태워다 준다. 커피나 차를 돈 내고 마신 기억도 별로 없다.

거리를 걷다보면 발길을 붙잡고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상점 주인이 지천이다. 행여나 길이라도 물어볼라치면 서로들 데려다주겠다고 아우성이다. 동양인이 낯선 아이들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웬일인지 흘끔거릴 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수줍은 탓이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눈길이 마주치면 세차게 손을 흔든다. 그 모습이 해맑다.

여정을 통틀어 가장 착한 민족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시리아인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내게 베푼 환대와 호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이들에게 '악의 축'이란 주홍글씨를 새겼다. 특정 세력에게 쓰일 법한 용어가 한 나라를 통째로 옭아맸다. 그 때부터 이 나라 국민 전체가 악의 무리처럼 여겨졌다. 시리아를 여행하기 전 내 속에 자리하던 편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위정자들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선량한 시리아인은 하루아침에 폭력적인 민족으로 낙인찍혔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리아를 여행한 후 나는 편견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다. 일방으로 전해지는 정보에 매달려 왜곡된 시선으로 시리아를 바라봤단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얼룩진 창으론 제대로 된 풍경을 감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생각의 창에 덕지덕지 붙은 편견의 때를 벗겨 낼 때 비로소 창 너머 진실이 보인다. 시리아가 내게 준 소중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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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엽서를 띄웁니다. 문득 엽서가 쓰고 싶어졌어요. 카파도키아는 그런 곳입니다. 풍경 하나하나가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지난밤에 이스탄불에서 밤차를 탔습니다. 많이 피곤했는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잠이 들었죠.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먼발치서 동이 터 오릅니다. 비몽사몽간에 짐을 꾸려 내렸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변 풍경이 몹시도 생경합니다.

황량한 벌판에 기암석이 삐죽삐죽 솟아 있습니다. 사방이 모두 그렇습니다. 혹성에 온 기분입니다. 우주선 비유에스(BUS) 호는 소행성 카파도키아에 저만 덩그러니 남겨두고서 지구 은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카파도키아는 한 마디로 규정짓기 힘든 풍경을 지녔다. 외롭고 황량한 듯 보이지만 기암 군락의 어우러짐은 왠지 모를 따스함을 품고 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통칭합니다. 제가 도착한 곳은 괴레메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먼 옛날 화산활동으로 이 지역에 셀 수 없이 많은 응회암이 생겨났습니다. 켜켜이 쌓인 화산재가 굳어져 돌덩이가 됐고, 비바람이 이를 깎아 다양한 모양의 기암석 군락을 만든 거죠. '자연이 빚어낸 수작'이란 찬사가 아깝지 않습니다.

며칠 사이 눈이 많이 왔습니다. 숙소를 나서기 전 단단히 채비를 해야 합니다. 밑동 잘린 나무에서 굵은 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고, 운동화에 짚단을 엮습니다. 이 정도면 눈 쌓인 둔덕도 끄떡 없겠다싶어 혹성탐사를 시작합니다.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동안 오르니, 괴레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너른 공간에 돌무더기가 빽빽합니다. 딱히 뭐라 규정하기 힘든 풍경입니다. 고요한가하면 돌 사이를 헤집는 바람의 울음이 적막을 깹니다. 외로운가하면 눈 덮인 기암 위로 새가 날아들어 친구가 됩니다. 삭막한가하면 사이좋게 어우러진 기암 군락이 온기를 전합니다.

비바람이 깎아 놓은 기암석은 그 모양이 다채롭다. 그 중 낙타를 빼다 박은 암석이 눈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앉아 솟아오른 돌덩이 하나하나를 관찰합니다. 그 크기와 모양이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어떤 놈은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어떤 건 제 키 만 하기도 합니다. 버섯 모양의 돌도 있고, 솜사탕같이 생긴 놈도 있습니다. 그 중 한 녀석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낙타모양의 암석입니다. 사람 손으로 빚어도 저리 만들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타를 빼다 박았습니다.

낙타바위를 보니, 중국에서 낙타를 탄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막 여행을 시작했을 때였죠.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중국 둔황의 사막에서였습니다. 11개월이 흘러 전 터키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터키는 실크로드가 끝나는 곳입니다. 역사의 현장, 그 '시작'과 '끝'을 모두 경험하고 나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게 마련입니다. '시작'과 '끝'을 떠올리자, 지난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처음 길을 나서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또 채우겠다고. 대한민국 울타리 안에서 굳어진 타 문화·인종에 대한 선입견, 시장논리에 길들여진 배금주의, 소수자·약자를 향한 차별…, 이런 것들을 남김없이 비우고, 그 자리에 좋은 것들만 채워오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카파도키아는 화산이 빚어낸 기암석 군락으로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은하계를 표류하다가 이름 모를 혹성에 떨어진 기분이 든다.


초심을 돌아보니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우리 돈 몇 백 원 때문에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별거 아닌 일에 '이
러니 너희 나라가 못사는 거야'하는 조롱과 멸시를 퍼부은 적이 많습니다.

접근하는 모든 이를 잠재적 도둑으로 의심하는가 하면, 구걸하는 아이를 매몰차게 내쫓기도 했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선 공연히 주눅이 들고,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곤 합니다.

서구를 여행하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을 느낄 때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정작 개발도상국 사람들에 대한 저의 편견엔 눈을 감습니다. 자신을 향한 불편부당함과 남을 향해 스스로가 행한 그것에 '이중 잣대'를 들이댑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석양에 길게 끌린 제 그림자가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상념에 빠진 채 둔덕 아래 기암석의 풍경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금 제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오랜 세월 쌓인 화산재가 응회암을 만들었듯, 제 마음속에도 버려야 할 것들이 견고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카파도키아 기암석은 비바람이 깎고 다듬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자리한 편견과 차별, 옹졸함은 무엇으로 닳아 없어지게 해야 할까요?

남은 여정 동안 제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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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할 때, 그 끝은 늘 참혹하다. 이긴 자는 사람이든 문화재든 진 자의 모든 것을 도륙한다. 힘의 균형이 기우는 순간 한쪽 문명은 폐허가 된다. 난무하는 살육과 파괴 속에 한 터럭의 자비도 없다.

'승자독식', 지난 10개월의 여정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미,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등 대륙을 막론하고 이 명제는 비켜간 적이 없다. 인류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문명이 힘의 논리에 스러져 갔는가. 잔혹하기 그지없는 인간사의 궤적을 훑다보면 번번이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현기증이 인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로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다. 유럽대륙 너머 멀리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아시아 대륙이 보인다.


그래서일까. 터키 이스탄불은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던 여러 문명의 어우러짐, 지배와 피지배의 간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승자의 관용, 2000년 고도 이스탄불은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승자독식'의 틀을 통쾌하게 무너뜨렸다.

이스탄불은 터키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역사 깊은 도시다. 도심을 관통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동서로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을, 남북으로는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한다. 오래전부터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의 종착지로서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던 만큼 이 도시는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아시아-유럽 사이 보르포루스 해협
동서양의 가교이자 문명충돌의 현장
'승자독식' 틀 깨고 기독-이슬람 공존


영토분쟁의 역사는 도시 이름의 변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으로, 로마 지배 하엔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다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접어들어 지금의 이름인 이스탄불로 굳어졌다. 지명과 함께 이스탄불을 둘러싼 패권 역시 변화를 겪었다. 기독교 문명의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이슬람교의 오스만투르크 시대로 권력이 이동한 것이다.

동서양의 가교 이스탄불에는 없는 게 없다. 터키 최대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에는 양 문명의 문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인간사에 만연해 있던 '승자독식'의 관행에 비추어 보자면, 패권을 쥔 오스만투르크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철저히 파괴했어야 한다. 하지만 정복자는 폭력 대신 관용을 택했다. 그 덕에 이스탄불 내 동로마(비잔틴 제국) 시대의 기독교 유적을 비롯해 인근의 그리스 유적까지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나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관용을 베푼 주체가 다름 아닌 무슬림이었기 때문이다. 서구가 가공한 창을 통해 나는 이슬람이 호전적이고 무자비하다고 생각해왔다. 이곳 이스탄불에서 공고하게 굳어진 선입견의 벽을 허무는 동안 왜곡된 역사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구시가지에 우뚝 선 '아야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비잔틴 제국을 함락한 직후 오스만투르크는 파괴와 약탈을 금했다. 그들은 서구 기독교의 상징이던 소피아 성당을 가리켜 '같은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라며 보존을 명했다. 이후 성당은 무슬림 교회인 모스크로 사용됐다.

동서양의 가교 이스탄불에는 없는 게 없다. 터키 최대 시장인 그랜드 바자르에는 양 문명의 문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바다를 접한 이스탄불에는 해산물이 넘쳐난다. 낚시꾼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관용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이스탄불 곳곳에서 목격한 타자에 대한 관대함은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로 각인된 이슬람의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서구 사관의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오스만투르크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 것도 이러한 관용 덕택인지 모른다. 대제국은 결코 총·칼로 유지될 수 없는 게 역사의 진리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탔다. 이스탄불 유럽 측 영토인 '트라키야'를 출발해 아시아 쪽 땅인 '아나톨리아'까지 운행하는 배편이었다. 좁은 해협 사이로 아시아와 유럽이 지척에 놓여있다. 고갯짓만으로 양 대륙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멀리 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가 마주보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상징물이 조화롭게 서 있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터키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트 바자르도 눈에 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답게 시장엔 동·서양 문물이 한데 뒤섞여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은 동과 서, 고와 금이 함께 숨 쉬는 '관용'과 '공존'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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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여정을 코앞에 두고,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리스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단다. 지난해 말 경찰의 총격으로 15세 소년이 숨진 뒤 촉발된 청년들의 봉기가 해를 넘어 극렬한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있었다.

이미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피해를 톡톡히 본 터라 불안감이 싹텄다. 지난해 4월과 7월, 티베트와 인도 자이살메르에서 여행 계획이 어그러진 바 있다. 티베트는 중국 공안의 '문화학살'이, 자이살메르의 경우에는 폭탄테러가 원인이었다. 당시 이들 땅을 밟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이후 일정까지 차질을 빚는 바람에 새판을 짜느라 진땀 뺐던 것.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아테네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며칠 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고 믿기 힘들만큼. 하지만 도심 곳곳에선 여전히 정부와 청년 간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혹 이번에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터키와 중동, 아프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육로이동의 거점이 그리스다. 베이스캠프에 발을 딛지 못하면 남은 여정은 물거품이 될 게 뻔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외신에 눈과 귀를 붙박았다.

신들의 축복일까. 다행히도 '신화의 나라'는 내게 여행을 허락했다. 1월 중순 들어 소요가 잦아든 그리스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안도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심정으로 수도 아테네에 도착했다.

오로지 입국 여부에만 신경 쓰느라 시위에 대해 톺아볼 여유가 없던 나는 그리스에 발을 딛고서야 사태의 본질을 깨달았다.

이번 시위는 경찰의 총격으로 한 소년이 숨지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 달여 동안 이어진 반정부 시위의 밑바탕에는 만성적인 청년실업 문제가 깔려 있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낮은 급료의 일용직을 전전해야 하는 '700유로 세대'(우리네 '88만 원 세대'와 같은 개념)의 분노가 공권력을 향해 들불처럼 번진 것이다.

88만 원 세대, 700유로 세대의 분노에 공감하다

소강국면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아테네 곳곳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벽면마다 정부를 규탄하는 낙서가 가득했고, 갈기갈기 찢어진 그리스 국기가 을씨년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공공기관 앞에선 제복의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를 섰고, 이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혼란의 흔적을 훑는 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청년실업', '사상 최악의 취업난', '비정규직'…, 이런 용어들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서양 너머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의 나라에서 온 '88만 원 세대'는 그리스의 '700유로 세대'에게 강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기린 파르테논 신전. 정녕 청년의 미래를 밝힐 지혜는 없는가? 답을 구해본들 여신은 묵묵부답이다.


문득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참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언컨대, 청년들이 겪는 실업의 고통은 그리스보다 한국에서 더 크고 깊다. 청년실업의 비율만을 놓고 보면 20%에 달하는 그리스가 7%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보다 심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치가 아니라 취업을 향한 눈물겨운 과정과 그에 따른 상실감 등 현상의 이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의 상황을 보라. 대학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교육에 가깝다. 적성이나 소질 따윈 헛구호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입시지옥에서 헤맨 후 대학생이 되면 상황이 나아지나? 어림없다.

상아탑은 직업훈련소로 바뀐 지 오래다. 신입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학점관리에 열을 쏟는다. 학점은 상대평가다. A등급을 위해 주저 없이 친구를 밟아야 한다. 교양? 캠퍼스의 낭만? 소가 웃을 일이다.

대학졸업을 앞두고는 취업을 위한 '~스터디'가 판을 친다. '면접대비 스터디', '합숙대비 스터디', '논술대비 스터디'…. 남녀 불문하고 성형 붐까지 인다. 토익 고득점, 고학점, 수 개의 자격증, 다수의 인턴 경험 등 너도 나도 이력서가 화려하다.

10년 세월 한결같이 취업에 매진하는 대한민국 청년, 그럼에도 그들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눈높이를 낮추라고? 허영심을 버리라고? 이러한 주문은 책임회피를 위한 '물타기'에 불과하다.

작은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환경부터 조성하라. 몇몇 거대집단이 다 해먹는 기형적인 구조론 안 된다. 굳이 서울이 아니더라도, 꼭 대기업에 입사하지 않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 달라. 입으로만 지역균형발전이니 중소기업 부양이니 떠들지 말고 이를 실현시켜 달라. 그런 다음 청년들에게 책임을 전가해도 늦지 않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리스를 포함한 유럽의 여타 나라 청년들 중 대한민국에서처럼 치열한 과정을 겪는 이들이 있는가? 동의할 수 없다. 그리스 청년들이 작은 생채기에 아우성치는 동안,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안고도 대한민국 청년들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묵묵히. 이 얼마나 고운 심성인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그리스 전역을 휩쓴 반정부 시위가 소강상태를 맞았다. 찢어진 채 을씨년스럽게 펄럭이는 그리스 국기가 당시의 혼란을 말해주고 있다.


바야흐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청년 수난시대'다. 씁쓸함을 달래고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올랐다. 눈앞에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를 기린 곳이다. 난국을 헤쳐 나갈 답을 구해보지만, 그녀는 말이 없다.

미궁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리스신화의 청년 테세우스가 떠올랐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다이달로스의 미로를 헤매는 테세우스처럼 우리 청년들은 꼬일 대로 꼬인 취업시장에서 방황하고 있다.

테세우스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그를 사모하던 아리아드네 공주의 도움으로 청년은 무사히 미로를 빠져나온다. 입구에서부터 공주가 전해준 실타래를 솔솔 풀어가며, 이를 이정표 삼아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의 끝은 어떨까? 우리에겐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나? 무엇을 이정표 삼아 이 미로를 빠져나올 것인가? 영원히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건 아닌가?"

수없이 많은 질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궁금증이 있다.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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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후세인, 진짜 반갑다. 나 또 길을 잃었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시장 골목이 이쪽이던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안면을 튼 그다. 수년지기 대하 듯 호들갑을 떨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상관이랴. 거미줄처럼 복잡한 메디나 골목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을.

체면도 차릴 때와 버릴 때를 알아야 한다. 그의 싸늘한 시선에 아랑 곳 없이, 계속 친한 척을 했다.

"꼬레아! 시장은 저쪽이라고. 나 지금 일해야 하니까 알아서 찾아."

손수레에 잡동사니를 늘어놓던 후세인이 퉁을 놓는다.

그럴 만도 하다. 두 시간 전, 미로 속을 헤매다가 행상하던 그에게 도움을 청했더랬다. 바쁜 와중에 그는 약도까지 그려가며 성의껏 길을 일러 주었다. 그런 호의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결국 나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페스의 메디나에는 수 백 갈래의 골목길이 나있다. 좁은 길 사이로 행상과 행인이 뒤섞인 메디나는 항상 북적거리고 활기차다.


발을 디딘 지 닷새가 넘었건만, 모로코 페스의 뒷골목은 마냥 낯설기만 하다. 페스는 수 천 년 전 조성된 아랍의 전통주거지로 유명한 도시다. '메디나'로 불리는 이 주거지는 지역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꼬인 실타래처럼 어지러이 펼쳐진 메디나의 골목길은 '이색 풍경'을 쫓는 전 세계 배낭족의 역마살을 자극한다.

메디나는 수백 갈래의 좁은 길을 품고 있다. 규칙이나 기준을 거부한 채 제 멋대로 뻗은 골목길 앞에서 방향감각 따윈 의미가 없다. 영화 <큐브>의 움직이는 미로처럼 메디나는 좀체 목적지를 내주지 않는다.

복잡하기로 이름 난 까닭에 많은 이들이 나름의 채비 끝에 메디나를 찾는다. 현지 안내원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고, 지도나 안내책자를 구입하기도 한다. 굴지의 여행사에서 내놓는 메디나 관련 상품도 많다. 모로코에 도착하기 전까지 골목길의 존재조차 몰랐던 나에게 시련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모로코는 원래 예정에 없던 여행지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중 뜬금없이 모로코 행을 결정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는 유로화의 부담과 혹독한 추위를 피하고 싶었다. 유럽 물가의 절반 수준으로 지중해 이남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모로코가 단연 매력적일 수밖에.

모로코 전통의상을 입은 노인.

하지만 이는 부차적 이유에 달하지 않는다. 모로코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유럽 여행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교통, 통신, 숙박 등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관광인프라, 호객행위는 고사하고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주의, 유럽의 이런 요소들이 처음엔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자 편안함은 곧 지루함으로 변했다. 매너리즘에 빠져들 시기, 새로운 자극이 절실했다.

모로코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로 스페인과 마주하고 있다. 스페인의 항구도시 알헤시라스에서 배로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당긴 김에 쇠뿔을 뽑기로 마음먹은 나는 곧장 모로코 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는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다. 이베리아 반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 유럽의 영향 또한 강하게 받았다.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배 하에 놓인 전력도 있다.

아랍과 아프리카, 유럽 등 각기 다른 문명이 녹아든 모로코의 문화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무뎌진 여행자의 촉수에 날이 섰고, 다시금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온종일 메디나의 미로 속에서 발품을 팔아야 할망정, 나는 유럽의 단조로움보다 모로코의 혼잡함이 좋다. 때 이른 소소리바람을 맞으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자면, 눈과 귀가 무료할 새 없다. 히잡과 차도르를 걸친 여인네, 때마다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코란의 읊조림,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이'가 입었던 모로코 전통복장 등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하나같이 생경하고 흥미롭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건 '찻집 문화'다. 메디나에는 차를 파는 곳이 많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남정네들이 허브 차나 커피를 홀짝이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도 금주를 권하는 이슬람교의 특성 상 이런 문화가 생겨난 듯하다.

유흥문화에 익숙한 내게 남자끼리 차 마시며 수다 떠는 모습이 영 낯설다. 찻집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허브 차를 시켰다. 오지랖 넓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모로코인,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예상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들어온 것조차 모른다. 모두들 찻집 천장에 매달린 TV에 빠져있다.

아랍의 전통주거지답게 페스의 메디나는 중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가죽으로 유명한 모로코인 만큼 페스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죽염색공장이 있다.


아랍방송은 아비규환의 가자지구를 비추고 있었다. 장면 장면이 섬뜩해 현기증이 일었다. 백린탄 파편에 살이 타들어간 노인과 흰 천에 둘둘 말린 아이의 시체를 보도하던 앵커의 목소리가 격앙된다. 찻집 안이 술렁인다.

속보는 끝났지만,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원성은 잦아들지 않는다. 그들은 둘러앉아 한참 동안 토론을 벌였다. 낯선 아랍어 사이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USA, UN 등 귀에 익은 단어가 들린다.

문득 나 혼자만 길을 잃고 헤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 인권, 도덕, 이성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 역시 방향을 상실한 채 가자지구의 뒷골목을 표류하고 있는 듯하다.

한낱 여행자야 발품 팔면 그만이라지만, 대의야 어디 그런가. 보편적 가치가 제 길을 찾지 못하는 동안 무고한 희생만 늘어가는 것을.

단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갈 요량으로 서둘러 찻집을 나왔다. 성벽 사이로 퍼져가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질녘의 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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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치'다. 초행길은 물론이고, 한두 번 다닌 곳에서도 헤맬 만큼 증상이 심각하다. 공간과 방향을 관장하는 우뇌반구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달음으로 목적지에 닿는 이들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존경심마저 든다.

여행 전 신문사에서 일할 때 항상 남보다 먼저 취재현장으로 향해야 했다. 길에서 허비할 시간을 고려해서다.

이러한 노력에도 자주 길을 잃고, 제 시간에 늦곤 했다. 먼저 도착해 취재기자를 기다리는 사진부 선배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세계일주 소식을 처음 접한 주변사람들의 걱정은 대단했다. 그들의 우려를 비웃으며 당차게 집을 떠났건만, 지난 9개월 동안 여기저기서 무던히도 헤매고 다녔다.

△ 밀과 고기를 주식으로 한 유목민의 후예답게 유럽인은 길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꾸려왔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어느 건물이든 문만 열면 눈앞에 길이 펼쳐진다.


목적지 코앞에서 하염없이 방황하다가 택시를 잡아타는 일이 허다했다. 같은 자리만 맴돌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미로를 빠져나온 적도 많다. 객쩍고 멋쩍은 고백이지만, 안에서 새던 바가지는 밖에서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랬던 내가 요즘 들어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며, 나는 단 한 번도 길 때문에 고민한 적이 없다.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조차 지도 한 장으로 어디든 찾을 수 있었다.

'갑자기 우뇌 전두엽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걸까?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뒤늦게 빛을 발하는 건가?'

행복한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감각 기능에 문제가 있는 '길치'란 얘기다.

그동안 내가 헤매지 않은 까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길이 그만큼 체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만 그런 게 아니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 먼저 둘러본 유럽 국가들 역시 잘 닦은 길을 소유하고 있었다. 유럽의 길은 광장을 중심으로 곧게 뻗어 있다. 종횡의 길엔 이름과 숫자가 표기돼, 다니기가 수월하다.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스페인의 네르하. 언제나 길을 만들어 떠나야 했던 서양인들에게 바닷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서양을 길 삼아 새 터전을 향해 떠났다.

정방형으로 가지런히 난 길을 보면 와플파이가 떠오른다. 동이나 마을 등 큰 단위에 익숙한 우리에게 생경한 모습이다.

권삼윤 씨가 지은 <빵은 길을 만들고, 밥은 마을을 만든다>는 책이 있다. 그 내용이 떠올라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책의 제목은 메타포다. 저자는 주식 개념을 들어 빵을 서양에, 밥을 동양에 비유하고 있다.

즉 서양에선 길이, 동양에선 마을이 중시된다는 뜻이다.

빵과 밥은 각각 밀과 쌀로 만든다. 건조한 유럽에서 잘 자라는 밀은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적은데다 영양분이 부족하다.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선 고기를 곁들여야 한다. 밀은 또한 지력을 약화시키는 까닭에 윤작이 힘들다. 가축에게 먹일 풀을 찾거나, 새로운 밀밭을 찾아 서양인은 끊임 없이 이동해야 했다. 그들 유목민에게 '길'은 숙명이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많은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스쳐지나간다. 개인주의를 가치관으로 하는 유럽인 사이에서 '나 홀로 여행자'의 고독감은 전에 없이 짙다.

반면 몬순지대의 혜택으로 물이 풍부한 동아시아는 벼 재배에 적합한 기후를 지녔다. 벼는 밀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영양소가 풍부한 완전식품이다. 특히 지력을 떨어뜨리지 않아 한 자리에서 윤작이 가능하다. 벼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나 댐 등의 관개시설 역시 정착생활을 부추겼다. 동양의 농경민에게 '마을'은 생존을 위한 단위였다.

주식이 낳은 양 문명의 특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 모든 건물은 문을 열면 바로 길과 맞닿는다. 큰 길과 거리를 두고 주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네와 사뭇 다르다. 주소를 적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 유럽에선 길 이름을 주소 맨 앞에 적어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동', '~번지'에 익숙한 나에겐 낯선 체계다.

'빵과 밥', '길과 마을'의 차이는 양 문명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하기에 유목민은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선시 한다. 대를 이어 한 곳에 머무는 농경민이 '우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상반된다.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고 있는 요즘, 전에 없던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다. 집을 나선 지 9개월이 넘은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단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마주한 탓이 크리라.

유럽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다. 개인주의로 무장한 유목민의 후손들과 길을 걸을 때면, 고독감은 더 짙어진다.

문득 밥 짓는 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빵이 만든 길 위에서, 나는 밥이 만든 마을을 사무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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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나이 한 살을 더했다. 서른이다.

서른이란 놈은 참 고약하다. 유랑생활에 정신없던 내 뒷덜미를 녀석은 인정사정없이 붙들었다. 무방비 상태였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느라 녀석이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피 끓는 젊음', '눈부시게 푸른 청춘'에 이별을 고하자면, 무언가를 정리하고 결의해야 하지 않는가. 녀석의 기습에 그저 멍하게 20대를 떠나보내야 했다. 느닷없이.

이 글은 서른을 맞은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의 단상이다. 아니 그보단 푸념 혹은 끼적임에 가깝다.

'서른이 뭐 별거냐!', 일찍이 서른을 맞이한 선배들의 질책이 귓전을 맴돈다. 하지만 초보에겐 뭐든 두렵고 막막한 법. 당신들의 격려를 바란다. 아울러 올해 서른이 된 1980년 생 동지들의 공감을, 예비 서른의 기로에 선 후배들의 위로를 기대해 본다.

볼리비아의 우유니는 20억 톤이 넘는 소금으로 가득하다. 천지가 온통 하얀 소금사막에 서서 서른의 삶을 생각했다.


남미 여정이 막바지에 접어든 지난 한달, 나는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 고생은 자초한 측면이 컸다.
 
남미에 관심이 많던 나는 세계일주 전체 일정 중 많은 날을 이곳에 할애했다. 좀 여유 있게 돌아 볼 요량이었다. 그 여유가 과했나 보다. 남미 여정 초·중반에 늑장을 부린 탓에 시간이 턱 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 달 남짓한 시간 안에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까지 가야했다. 넓디넓은 남미대륙임을 감안할 때 이동하는 것 만해도 벅찬 동선이다. 하물며 봐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당에….

이 기간 나는 침대에서 잔 날보다 버스에서 눈을 붙인 날이 더 많다. 시간을 벌기 위해 야간 버스에 올라 새우잠을 잤다. 50시간에 달하는 장거리 국제버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면부족으로 머릿속은 늘 공허했고,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여행이라기보단 차라리 극기훈련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서른은 줄기차게 내 뒤를 밟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승냥이처럼 까치발을 하고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왔던 것이다.

소금사막으로 가는 길목에 버려진 철길이 있다. 소금과 함께 광물을 실어 나르던 열차가 운행을 멈추자, 철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철길을 위로하려는 듯 두 사람이 선로 위를 걷고 있다.

이를 자각했을 때 나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에 서있었다. 서른 즈음, 정확히 새해를 열흘 앞둔 시점이다.

우유니 소금사막은 세계 최대 규모의 염호다. 염분을 가득 머금은 호수가 뜨거운 태양아래 증발, 20억 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소금밭이 생겨났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새하얀 소금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사이에 서 있자니 천지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허공에 발을 디딘 듯 몽롱한 기분이 드는가 하면, '하얀 방'에 갇힌 듯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공감각 기능을 담당하는 뇌 일부가 녹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소금 결정체가 반사하는 볕 때문에 부신 눈을 뜰 수 없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하루아침에 눈이 먼 사람들, 모든 게 새하얗게 보이는 '백색공포'가 책의 소재였다. 문득 눈이 멀까 두려워졌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서른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니 녀석은 이미 목전에 와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서둘러 소금사막을 캔버스 삼아 서른의 삶을 그려보지만 허사다. 볕을 머금은 소금처럼 머릿속이 온통 회백색이다. 그 와중에도 불안감만은 고개를 쳐들고 생각의 언저리에 자리 잡는다.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뭘 해야 하지? 사상 최악의 취업난이라는데 이대로 백수로 늙는 것은 아닐까? 친구들 중엔 벌써 대리를 단 놈도 있고, 가정을 꾸린 놈도 있는데 이대로 뒤처지는 건 아닐까? 여행 후 내게 남는 건 뭘까?'

사치스런 감상을 접고 다시 길에 섰다. 숨 가쁘게 내달려 겨우 목적지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서른을 하루 남겨둔 12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신은 6일을 만든 후 마지막 7일째인 휴일을 브라질에 주셨다."

놀기 좋아하는 브라질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브라질 국민의 한량 기질은 세계 최고임이 틀림없다. 맥주를 홀짝이며 삼바 음악에 몸을 흔드는 이들이 지천에 널렸다. 2월의 카니발과 더불어 브라질 최고의 축제로 꼽히는 신년행사가 어떨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리우데자네이루의 해안가는 새해를 맞으려 몰려든 수 만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불꽃은 밤하늘을 수놓았고, 삼바리듬에 맞춘 물라토의 몸짓은 지상을 수놓았다. 축제가 최고조에 달할 즈음, 모두가 한 목소리로 숫자를 셌다.

브라질의 이구아수 폭포. 세계 최대라는 수식어답게 낙폭과 물량이 어마어마하다. 물 떨어지는 굉음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축포가 터졌다. 2009년 새해가 밝은 것이다. 백사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함성이 파도소리를 잠재웠다. 여기저기 얼싸안은 사람들이 새로운 한해를 축복하며 볼인사를 나눴다.

그 열기에 휘둘려 잠시 내가 서른이 됐다는 사실을 잊었다. 북적거림은 새벽 동이 틀 무렵에야 잦아들었다. 다시금 서른의 무게가 마음을 짓눌렀다. 나는 코파카바나 해변에 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바다는 수 만 명이 버리고 간 부유물로 가득했다. 이른 새벽 출렁이는 파도에 부유물이 춤을 춘다. 앞선 파도가 해안가로 가져다 놓은 부유물을 뒤이은 파도가 다시 바다로 쓸어간다.

공자는 서른을 일컬어 '이립'이라 했다.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란다. 그의 바람과 달리 서른을 맞은 나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코파카바나 해변을 떠도는 부유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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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태양은 천지간 만물을 녹일 기세다. 머리 꼭대기에 똬리를 튼 볕 앞에 자외선 차단제 따윈 조소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나절이 못돼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이 돋더니, 생채기에 소금을 댄 듯 따끔거린다.

사람뿐이랴. 철옹성처럼 우뚝 선 건물도, 강철처럼 단단한 아스팔트 도로도 대자연의 공세에 무력하게 아지랑이 숨만 토해낸다.

무엇이 페루 하늘의 태양을 진노하게 만들었을까?

우루밤바 강을 따라 형성된 정글을 헤치고, 다시 한참 동안 험준한 산맥을 오르고서야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천연의 요새는 스페인의 파괴를 피해 그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페루는 태양 신의 후손인 잉카족이 세운 나라다. 13세기 말 페루에서 제국의 초석을 다진 잉카인은 선진문명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을 통합해 갔다. 200년 동안 발전을 거듭한 끝에 잉카제국은 페루를 중심으로 지금의 에콰도르·아르헨티나·칠레에 이르는 너른 땅을 다스린다. 짧은 시간에 남미 최대의 문명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들은 제국 곳곳에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쳤다. 정성스레 쌓은 석조 건물에 태양 문양을 수놓고, 제단을 만들어 기도를 올렸다.

태양신은 화답했다. 따뜻한 볕을 선사하는가 하면, 때론 비구름 뒤로 물러나 시원한 빗줄기를 내렸다. 곡식은 풍부했고, 가축은 살이 올랐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제국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16세기 초반 한 무리의 이방인이 제국을 찾았다. 잉카인은 그들을 환대했다. 태양신의 후손들은 하얀 피부에 가려진 이방인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침략군은 그렇게 손쉽게 제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태양신을 섬기던 신전이 허물어지고, 성당이 지어졌다. 해체된 제단은 침략군 막사의 돌담으로 전락했다. 뒤늦게 제국을 지키려 봉기한 잉카인은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앞에 맥없이 스러져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태양신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잉카문명의 발상지 '티티카카' 호수에서, 최후의 보루 '마추픽추'에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나는 하나의 문명이 탄생하고, 발전하고 결국엔 한낱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잔혹한 인간사를 보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푸노의 티티카카는 해발 4000m 상당에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다.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하늘과 맞닿은 이 호수에 태양신의 아들인 망코 카파크가 내려와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강림 전설'에 걸맞게 티티카카는 신비감이 짙게 깔린 호수였다. 하늘을 담은 호수 위에는 갈대의 일종인 토토라로 만든 인공섬이 점점이 떠있다.

잉카 전설에 따라 태양신의 아들이 내려왔다는 푸노의 티티카카 호수. 갈대로 만든 집과 배가 인상적이다.


갈대를 꺾어 만든 보금자리에서 잉카의 후예들은 물결을 따라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와 호수 위를 거닐던 태양신의 아들 망코 카파크를 보는 듯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하늘 호수'는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한없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고 쿠스코로 향했다. 잉카 문명의 정수로 꼽히는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서였다.

'늙은 봉우리'란 뜻의 마추픽추는 '공중도시' 혹은 '잃어버린 도시'로 불린다. 쿠스코에서 우루밤바 강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 정글지대. 이곳에서 다시 험한 산맥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마추픽추가 자리하고 있다.

표고 2400m의 마추픽추는 잉카문명이 끝을 맞고 400년이 지난 1911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잉카 최후의 도시답게 첩첩산중에 꼭꼭 숨겨진 도시는 스페인의 야만적인 파괴를 피해 오롯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차와 버스, 도보로 이어진 힘든 여정 끝에 마추픽추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동은 쉬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찼다. 험한 정글을 헤치고 1만 명을 수용할 만큼 거대한 규모의 도시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칼 한 자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진 건축물은 가히 잉카문명의 정수라 불릴 만했다.

페루에서 나는 잉카문명의 '시작'과 '끝'을 보았다. 단순히 '보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 명치끝이 아려왔다. 여정 8개월 동안 힘의 논리에 스러져간 문명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탓이다.

아시아의 티베탄과 위구르족이, 오세아니아의 어보리진과 마오리족이, 북·중미의 마야문명과 아스텍문명이 그랬다. 그리고 남미의 잉카문명까지.

우위를 점한 자들의 논리는 판에 박은 듯 똑같다. 그들은 언제나 파괴와 살육의 이유로 문명의 미개함을 든다.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제멋대로 상대 문명을 재단한 후 개화라는 미명 아래 수백 년간 이어온 소중한 문화유산을 짓밟는다. 잔혹한 파시즘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패권주의의 망령은 지금도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스러져간 문명을 보며 그저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생각 한 편에 자리한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도무지 지워지질 않는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돼 지키자고. 강자의 지배 논리에 맞서 공존과 평화의 원리를 지키고, 자본의 논리에 맞서 인간의 논리를 지키자고."

과연 우리는 숲이 돼 지킬 수 있을까? 깜냥이 부족한 여행자에겐 참으로 어려운 담론이다.


[지구별 단상]내 머리가 하늘에 닿았을까?

티티카카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호수다. 해발 4000m의 고지대에 자리한 만큼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조차 하기 힘들다.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이 코앞에 있다. 손을 뻗으면 이내 닿을 듯이 가깝다. 갈대로 만든 배를 타고 유유자적 호수 위를 떠돌자니 엉뚱한 상상이 든다.

'이대로 펄쩍 뛰면 머리가 하늘에 닿지나 않을까? 정수리를 쿵하고 찧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지. 까짓것 뛰어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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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자전축과 직각을 이루는 위도 0도의 선', 적도다.

역시 딱딱한 용어를 사용한 정의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쉽게 설명해 보자.

스케치북에 지구를 그린 후 이를 반으로 접을 때 생기는 종이 자국, 지구본의 어느 한 가운데 굵은 펜을 갖다 대고 빙그르르 돌릴 때 그려지는 선, 지구 정중앙을 가르는 선이 적도란 얘기다.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원주민 비율이 높은 에콰도르. 하지만 패권주의의 희생양이 된 원주민의 삶은 고달프다. 키토 구시가지에서 전통춤을 추는 여인네의 치맛자락이 구슬프게 휘날린다.

스페인어로 에콰도르(Equador)는 적도를 뜻한다. 남미 북서부의 작은 나라 에콰도르는 국명에서 알 수 있듯 적도에 자리하고 있다.

'위도0도 적도에 위치한 그곳은 아마 덜함과 더함이 없는 평등함을 간직하고 있겠지?'

적도는 치우침이 없다. 북극점과 남극점 사이에서 지구를 정확히 두 개의 반구로 나눈다. 위도 0도…, 덜함과 더함이 없는 숫자 0처럼 적도는 공명정대한 선이다.

스페인 풍의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에콰도르. 사진은 키토 구시가지의 대성당.


그래서일까. 에콰도르에서 불평등을 감지하고서,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종·횡을 공평하게 가르는 적도국이건만, 그 속에 내재된 민중들의 삶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마치 굳게 믿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도착했을 때 생경한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다. 물론 도시의 겉모습은 3개월 동안 보아온 다른 남미 국가와 다를 바 없었다. 스페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대성당과 국회의사당, 유럽풍 광장과 골목 등 키토는 눈에 익은 전형적인 콜로니얼(식민) 도시였다.

내가 낯설게 느낀 건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다. 지금껏 칠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에콰도르에서처럼 많은 수의 원주민을 본 적이 없다. 백인 비율이 높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선 이곳이 유럽이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들었더랬다.

행상 원주민의 모습에선 고단함이 묻어난다.

에콰도르는 달랐다. 순수 원주민의 비율이 25%로, 국민 4명 중 1명이 잉카의 후예였다.

거리 곳곳에서 전통 복장을 입고, 고유 언어인 케추아어로 얘기하는 원주민을 보니 가슴이 설렜다.

오래지 않아 설렘은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원주민의 고단한 삶을 오롯이 느꼈기 때문이다. 볕 좋은 날 구시가지의 한 광장. 망중한을 즐기는 동안 나는 수십 명의 원주민과 마주했다.

아이를 들쳐 업은 채 필사적으로 수제품을 펼쳐놓던 아낙, 먼지가 뽀얗게 쌓인 엠빠나다(남미 고유의 음식, 만두와 비슷함)를 들이밀던 남자, 새까만 고사리 손을 내밀며 구걸하던 아이들, 모두 남루한 행색의 원주민이다.

아낙은 30분이 지나도록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번번이 거절하기 미안해 펼쳐 놓은 물건을 집어 드는 순간, 여기저기서 다른 행상들이 몰려들었다. 제 것을 사라고 아우성치는 통에 결국 아낙의 물건을 사주지 못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등에 업힌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지만 가난과 싸우고 있는 잉카 후예들의 삶은 결코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늦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문 앞이 소란스럽다. 식당 주인이 한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사내가 초콜릿이 가득 담긴 광주리를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막아섰다. 손님들에게 초콜릿을 팔려다 문전박대당한 이 사내 역시 원주민이다.

16세기,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지휘하는 침략군이 잉카문명을 집어 삼킨 이래, 잉카의 후예들은 지배자의 핍박과 억압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원주민은 고단한 삶을 대물림하고 있다. 인간사는 약자에게 한없이 가혹하다.


에콰도르에서는 계란이 선다. 과학에 문외한인지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중력과 관계가 있단다. 아무튼 많은 여행자들이 적도가 지나는 산안토니오 마을을 찾아 계란을 세운다. 심지어는 못 머리 위에서도 계란이 선다.

원주민은 계란과 닮았다. 그들은 쉽게 깨지고 상처 받는다. 식단의 언저리에 오르는 계란처럼 원주민의 삶도 늘 주변부에서 겉돈다.

좀처럼 세우기 힘든 계란이 적도에서 섰다. 잉카의 후손들 역시 언젠가는 우뚝 서리라 믿는다. 아니 그러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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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상황에서 악재가 반복될 때 이를 징크스라 한다. '국경 징크스'…, 거듭 찾아드는 불운의 사태를 나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나라 사이 경계가 곧 국경이다. 한 대륙 안에 여러 나라가 더부살이하는 만큼 남미에는 국경이 참 많다. 남미 지도를 펼쳐놓고 국경을 표시하면, 요리조리 그려진 빗금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를 거쳐, 에콰도르 국경에 도착하기까지 험난한 여정이 이어졌다. '국경 징크스'는 여행 7개월 만에 찾아온 최대 난적이다.



대개 국경 폭은 수백 미터를 넘지 않는다. 걸어서 5분이면 건널 수 있는 짧은 거리지만,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내겐 망망대해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걸어서 5분이면 충분한 짧은 거리…돈에 눈먼 '부패 경찰'과 실랑이
저렴한 요금에 현혹, 버스 잘못 타…거액 벌금에 복잡한 행정절차까지

베네수엘라에서 콜롬비아로 향하는 길목. 국경을 앞두고 느닷없이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탓이다. 수개월 전 네팔·인도 국경에서 사기를 당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땐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지, 설마 또 그런 일이 생기겠어?'

스스로 위로하며 국경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베네수엘라 경찰 두 명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 명은 땅딸막한 키에 바싹 말랐고, 다른 이는 지나치게 체격이 컸다. 고목과 매미가 떠올랐다. 썩 좋은 인상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으레 하는 검문이겠거니 하고 요구에 응했다. 이어 짐을 풀란다. 1년 치 생필품으로 가득 찬 배낭을 풀어헤치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양말 한 켤레, 팬티 한 장, 칫솔, 치약까지 일일이 확인하는 통에 슬쩍 부아가 치밀었다.

'거참! 직업 정신 한 번 투철한 양반들이군.'

겨우 짐을 추스르고 돌아서는 찰나 '매미' 쪽이 나를 붙잡는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우니 다시 짐 검사를 해야겠단다.

황당함과 분노가 밀려왔다. 쏘아 보는 내게 '고목' 쪽이 지폐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통과하고 싶으면 돈을 달라는 의미였다.

여행 전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베네수엘라에서는 경찰의 부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해, 검문을 빌미로 여행자의 돈을 갈취한다는 소문이었다.

'아무렴, 그래도 경찰인데'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일을 당한 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여행자 사이에선 '베네수엘라 경찰 퇴치법'이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수첩과 펜을 꺼내 더듬거리는 스페인어로 물었다.

"당신들 이름이 뭐야? 이거 불법이잖아. 한국 대사관에 연락할 거야."

제복에 새겨진 이름을 적자, '고목'과 '매미'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기세가 오른 나는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그들을 몰아쳤다. 효과가 있었다. 귀엣말을 주고받더니 두 경찰은 슬그머니 꽁지를 내뺐다.

당시엔 몰랐다. 그 일이 '국경 징크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벽녘에 베네수엘라 국경마을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콜롬비아 국경마을 쿠쿠타가 지척에 있다.

이제 두 마을 사이에 자리한 양국의 출입국 사무소만 들르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마을에서 출입국 사무소까지 이동하려고 여행자 대부분은 택시를 탄다. 서둘러 택시를 잡으려는데, 큼지막한 푯말을 단 낡은 버스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푯말에는 '출입국 사무소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택시비 삼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저렴한 가격이 구미를 당겼다.

서둘러 차에 올랐다. 버스 안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 현지인이었다.

한 시간가량을 달리던 차가 길 한 편에 정차하더니 시동을 껐다. 출입국 사무소라 생각하고 내렸건만,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국경의 삼엄함과 엄숙함 대신 저잣거리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행인에게 묻자 경악할 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콜롬비아란다.

버스가 출입국 사무소도 들르지 않고 베네수엘라에서 곧장 콜롬비아로 넘어온 것이다. 비자에 해당하는 출입국 도장을 받지 못한 나는 졸지에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생업을 위해 양국을 오가는 현지인은 임의로 국경을 넘나드는 경우가 종종 있단다. 하필 내가 탄 버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금전적·정신적·육체적·시간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 자리한 이민국을 찾아가 거금의 벌금을 물고, 수일 동안 복잡한 행정절차에 시달리는 동안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 그것도 한밤중에.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국경 지역을 넘어가던 일부 차량의 유리창이 파손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로에 발이 묶인 채 걱정스레 파손된 차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나는 콜롬비아를 떠나 에콰도르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시간을 허비한 탓도 있지만, 그보단 새로운 나라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소박한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국경 징크스'가 또다시 발목을 잡은 것.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간 국경 근처에서 나는 사흘 동안 발이 묶인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폭우로 좁은 산길이 무너져 버스 운행이 중단된 탓이다.

사흘 내내 터미널에서 배수진을 친 끝에 겨우 에콰도르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한숨 돌리나 싶었건만, '국경 징크스'는 마지막까지 제 임무에 충실하다.

이번엔 한밤중 총격전이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간 국경지대인 루미차카 지역을 한 시간 남짓 남겨두고 국경으로 향하던 모든 차량이 멈춰 섰다.

수십 대의 군·경 차량이 사이렌을 울려대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예전보단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콜롬비아 국경 지역에선 반군 게릴라가 출몰하고 있다. 앞서 국경으로 떠났던 차량 중 일부가 유리창이 깨진 채 돌아오자 사람들의 술렁임은 더해갔다.

결국, 도로에서 새우잠을 잔 채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어슴푸레 새벽이 오자, 그제야 차량운행이 재개됐다. 에콰도르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은 밝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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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무치게 책이 그리웠다. 7개월 동안 활자를 접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단 깨달음을 향한 간절함이 더 컸다.

스스로 말하기 겸연쩍지만,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취미를 물어오면 주저 없이 책 읽기라고 답하곤 한다. 신에게 밉보여 끝없이 갈증을 느껴야 하는 그리스신화 속 '탄타로스'처럼 나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있다. 독서를 통해 책의 정수를 빨아들일 때면, 한 여름 논바닥처럼 갈라진 내면의 대지가 촉촉이 젖어 옴을 느낀다. 이런 희열 때문에 습관처럼 책을 읽었더랬다.

칼라파테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칠레령 토레스델파이네. 산은 늘 한 가득 깨달음을 안겨준다.



바다·산·빙하, 그 안에서의 깨달음
짜릿한 희열 안고 또 새로운 곳으로

입에 가시가 돋는 경지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어쨌든 반년이 넘도록 책과 결별한 내게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오가다 만나는 한국 여행객들에게 책을 구걸해 봤지만 허사였다. 어느 나라 건 서점은 있기 마련, 허나 매번 높다란 언어장벽에 막히기 일쑤였다. 무미건조한 가이드북을 몇 번씩 곱씹지만, 그럴수록 독서에 대한 향수만 짙어갔다.

파타고니아의 칼라파테는 이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준 고마운 도시다. 그곳에서 책을 구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올시다'다. 다만 나는 칼라파테에서 흔히들 말하는 책이란 텍스트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타고니아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녔다. 동서로 대서양과 태평양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고, 내부로는 깎아지른 기암절벽의 안데스 산맥, 광활한 팜파스 지형, 거울처럼 맑은 호수, 신비로운 빙하가 조화를 이룬다. 자연의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나는 파타고니아 중심부인 칼라파테에서 자연을 벗삼아 낚시를 하고 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처 저술되지 못한 수십 권의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곧 살아 숨 쉬는 생생한 독서였다.

칼라파테는 송어 낚시로 유명하다. 송어를 잡기 위해선 떡밥이나 지렁이 대신 루어라는 모형을 사용한다. 릴 낚시대에 송어를 자극할 만한 먹이 모양의 루어를 달고, 이를 수면을 향해 멀찌감치 던진다. 이후 줄을 감아 주면 루어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물속을 유영하며 딸려오는데, 송어가 이를 먹이로 착각하고 덥석 문다. 이때 줄을 감는 타이밍과 속도가 중요하다. 너무 늦게 감으면 수면 깊숙이 가라앉은 루어가 물풀이나 바위에 걸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줄을 끊어야 한다. 반대로 조급함에 빨리 감으면 송어가 루어를 발견하지 못해 허탕을 치게 된다.

칼라파테에서 송어를 낚던 호수다. 어디가 수면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호수는 맑고 깨끗하다.


루어가 적당한 위치에 침잠했을 때 알맞은 속도로 줄을 감아야 한다. 즉, 완급조절이 송어를 낚는 비결인 것이다. 생전 처음 루어낚시를 접해본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이를 터득했다.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돌이켜 보면 타이밍과 속도, 완급조절에 실패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을까? '뭐든 때가 있다'는 진리를 무시한 채, 늑장을 부리는 동안 수많은 기회가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줄을 감아본들 소중한 가치들은 이미 수면 아래 있는 바위에 걸려 꿈적도 하지 않는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정신이 팔려 섣불리 행동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수두룩하다. 조급하게 줄을 감게 되면 송어는 절대 루어를 물지 않는 이치다. 안타깝게도 '깨달음'은 늘 '후회'보다 반 박자 늦게 찾아온다.

낚시 뿐 아니라 명산 토레스델파이네를 오르는 동안에도, 모레노 빙하를 탐방하는 동안에도 나는 독서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태초부터 천지간에 책이 없었던 적은 없다. 동틀 무렵 구름과 바다 사이를 살펴보면 언제나 수억만 권의 문자가 있었다"던 옛 성현의 말씀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책 속의 지식을 흡수하듯, 세계와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이 곧 독서란 얘기다.

나는 어제도 책을 읽었고, 오늘도 책을 읽는 중이며, 내일도 책을 읽을 것이다.

아름답고도 슬픈 사연을 가진 모레노 빙하는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지구별 단상]'아내, 그리고 남편' 빙하 속 시린 사연   
 
2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빙하를 찾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앉아 빙하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슬퍼 보여,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매일 여기서 뭘 하는 거요?"

그가 대답했다.

"아내를 기다린다오."

"당신 아내가 어디 있는데, 이렇게 빙하를 찾아오는 거요?"

남자는 손끝으로 빙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 아내는 저 빙하 속에 있소."

20년 전 아내와 함께 칼라파테로 신혼여행을 온 이 서양인의 운명은 가혹했다. 빙하 트레킹을 하던 도중 아내가 무너진 빙벽 사이로 떨어져 실종된 것이다. 그는 절규하며 아내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은 그더러 포기하라고 했다. 철옹성 같은 빙하가 삼킨 이상, 시신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기다렸다. 고국에 두고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칼라파테에 머물며 20년을 한 결 같이 빙하를 찾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빙하 붕괴로 떨어져 나와 표류하던 유빙 속에서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꽁꽁 언 아내를 안은 채 그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칼라파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모레노 빙하가 시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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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우수아이아에 왔다.

세계의 끝이라…, 어감이 참 멋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수아이아는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끝'이라 해야 옳다. 바다 너머 남극이 있기에 우수아이아가 세계의 끝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덕지덕지 토를 단 정의는 운치가 없다. 세계의 끝, 얼마나 간결하고 낭만적인가.

우수아이아 남단에 위치한 우체국. 세계의 끝자락에서 보내는 편지 한통이 운치를 더한다.

우수아이아는 파타고니아 최남단에 자리한 작은 도시다.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의 남쪽 지역으로, 세계에서 남극과 가장 가까운 대륙이다. 고로 '우수아이아=세계의 끝'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여정을 앞두고 우수아이아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도대체 세계의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은 살까? 듣도 보도 못한 괴 생명체가 있진 않을까? 날씨가 혹독한 거 아닐까?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거 아닐까? 사막이나 황무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지 않을까?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은 하나같이 엉뚱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탓이리라. 다소 염세적인 이 작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세계의 끝을 불완전한 곳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림자를 잃은 사람들, 일각수(뿔 달린 말, 유니콘)…, 뭐 이런 요소들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계의 끝을 달리는 녹색·빨간색의 미니기차가 앙증맞기 그지 없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설렘으로 이어졌다. 우수아이아행 비행기를 손꼽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신비의 땅에 발을 디뎠다.

애석하게도 상상의 날개는 공항 청사를 나서는 순간 퍼덕거리던 날갯짓을 멈췄다. 세계의 끝은 그저 평화롭고 조용한 동네였다. 살짝 부아가 치밀어 생떼를 부렸다.

"이 봐요 하루키 씨! 세계의 끝이라고 뭐 특별할 게 없잖아요. 그냥 사람 사는 동네군요. 뿔 달린 말도,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이런저런 몽상에 빠진 채 동행을 기다렸다. 우수아이아로 오기 직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 또래의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는데, 목적지가 같아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것. 비행시간이 엇갈린 탓에 먼저 도착한 나는 공항 로비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친구 엘리자와 한국인 동행 재현. 옷깃이 스친 연으로 동반자가 됐다. 세계의 끝과 어울리는 기묘한 만남이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돌아보니 집 채 만 한 배낭을 두른 서양 여자 애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녀는 함께 여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재현, 엘리자, 셋의 동행이 시작됐다. 일면식도 없던 이들과의 기묘한 만남, 세계의 끝과 딱 맞아떨어지는 설정이다.

마을은 고즈넉했다. 바람 한 점 없는 해안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여염집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거울처럼 투명한 호수는 하늘과 산, 배를 수면 위에 담아냈다. 소싯적 미술시간에 배웠던 '데칼코마니' 같다. 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칠하고 이를 반으로 접었다 펴면 똑같은 모양이 나오던.

머물던 숙소에서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한 히피 청년이 말하길 우수아이아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산파블로'라는 곶이 있는데, 그 풍광이 예술이란다. 교통편이 마땅찮아 여행객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도 하단다.

세계의 끝 중에서도 끝인 산파블로 곶. 난파된 배가 파도에 휩쓸리는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그 길로 차를 빌렸다. 곶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개발이 덜 된 터라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 수 십리나 이어졌다. 차로 한참을 들어가자, 드문드문 보이던 차량과 인적이 뚝 끊겼다. 멀리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 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 소리쳤다.

"맙소사, 진짜 뿔 달린 말이 있네."

야생동물에 관심이 많던 엘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저건 낙타과에 속하는 과나코라는 동물이야."

유니콘이 아니면 어떠랴. 어쨌든 세계의 끝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생경한 풍경인 것을.

얼마 후 우리는 차에서 내려야 했다. 곶의 끝에 도착한 것이다. 지도를 뒤적거리던 재현이가 말했다.

"여기가 진짜 세계의 끝이야. 막다른 길이라고."

바다 위에 난파된 배 한 척이 표류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녹슨 철 덩어리를 요리조리 흔들어 대는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우리 셋, 유니콘을 닮은 과나코, 죽은 배 한 척…, 영락없는 세계의 끝이다.


지구별 단상

<보낸 곳 : 우수아이아 땅 끝 우체국>

"편지 왔습니다."

"어디서 온 편지죠?"

"세계의 끝이요."

"그런 곳에 우체국이 있나요?"

"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편지를 씁니다. 심지어 편지를 보내려고 세계의 끝을 찾는 이도 있답니다."

"왜죠?"

"글쎄요. '끝'이 주는 상징성 때문 아닐까요? '끝'의 또 다른 이름은 '시작'이니까요. 세계의 끝도 달리 보면 세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시작은 희망을 의미하죠. 땅 끝 우체국은 어떤 종류의 희망이든 배달해 주는 '무진장(無盡藏)의 곳집'입니다"

Posted by 탄타로스

도시는 저마다의 색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면 여행자 각자의 경험이 도시의 색을 정한다. 나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빨간색'으로 기억한다.

탱고의 본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어디서건 탱고에 심취한 이들을 볼 수 있다.


여행 6개월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년 여정의 딱 절반을 소화했을 뿐인데, 심신에 쌓인 피로가 꽤나 깊었던 모양이다. 역시 낯선 곳을 떠도는 일이란 쉽지 않다.

나는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여행 중에 휴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여행자에겐 여행이 곧 일상이다. 업무에 시달린 직장인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듯 여독에 찌든 장기여행자 역시 적절한 시기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자유분방함을 잘 드러내는 거리의 조각상.

이런 이유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내 달력은 온통 '빨간 날'이었다. 긴 호흡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산문 같은 여행 대신, 여백과 운율을 살린 시 같은 여행으로 고단함을 씻기 위해.

가장 먼저 취침과 기상 시간에 대한 속박을 풀었다. 온종일 숙소에서 하릴없이 뒹굴 거리다가 늘어지게 잤다. 주홍글씨처럼 아로새겨진 피로를 지우기 위해 자고 또 잤다.

숙면과 함께 식사에도 신경을 썼다. 빵 조각이나 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워온 터라 여행 6개월 만에 몸무게가 10kg가까이 줄었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선택한 메뉴는 쇠고기. 웬 호사냐 반문하신다면 오산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쇠고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싸다. 우리 돈 3000원이면 질 좋은 안심과 등심 살코기 1인분(400~500g)을 너끈히 살 수 있다. 고기질은 십 수 만 원을 호가하는 한국 레스토랑의 쇠고기 스테이크 부럽지 않다.

'빨간' 육질 위에 눈꽃처럼 퍼진 마블링,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는 쇠고기를 먹었다. 스테이크에 지치면 아르헨티나 전통 쇠고기 바비큐인 아사도를 즐겼다.

쇠고기엔 늘 와인을 곁들였다. 역시 우리 돈 2000원이면 양질의 '신의 물방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잔에 한 가득 담긴 '빨간' 와인은 심신에 깃든 여독을 녹였다.

값싸고 품질 좋은 아르헨티나 산 쇠고기와 와인은 가난한 배낭여행자를 흐뭇하게 했다.


쇠고기와 와인을 먹는 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왜 이토록 값싸고 품질 좋은 아르헨티나 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을까? 게다가 아르헨티나에서 사육하는 소는 광우병 위험이 전혀 없지 않은가. 이곳에선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청정한 풀을 뜯는 소떼를 쉽게 볼 수 있다. 광우병의 원인인 동물성 사료는 먼 나라 얘기인 셈. 미국도 광우병 위험을 인지한 직후 아르헨티나 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는 마당에 정작 우리는…, 아무튼 세상엔 소시민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참 많다.

먹고 자는데 지치거나, 무료함이 찾아올 때면 시내에 탱고 공연을 보러 나갔다. 물론 공짜다. 탱고의 본고장답게 부에노스아이레스 어디서든 쉽게 탱고를 접할 수 있다. 노천카페, 공원, 길거리 할 것 없이 4분의 2박자의 탱고선율에 맞춰 몸을 섞는 커플이 지천에 널렸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허벅지까지 갈라진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새하얀 셔츠에 '빨간' 장미를 입에 문 남성의 몸짓, 탱고는 역시 정열과 매혹의 춤이었다.

쇠고기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마시고, 탱고를 보는 동안 열흘은 쏜살같이 흘렀다. 잘 쉬고, 잘 먹은 덕에 볼과 배에 살집이 올랐다. 피로가 걷힌 자리에 희미해져 가던 역마살이 들어찼다. 붉은 도시를 떠나 다시금 길 위로 나설 때다.

문화의 도시답게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곳곳에는 행위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Posted by 탄타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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