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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그랜드캐니언과 미국인의 기질

자동차를 빌려 본격적으로 미국 서부 여행에 나섰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그랜드캐니언으로 향하는 길, 끝없이 이어진 네바다 주의 사막은 사람 혼을 '쏙' 빼놓았다.

사막은 괜히 사막이 아니다. 천지가 펄펄 끓는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살갗이 화끈거리고, 건조한 모래 바람에 숨쉬기조차 버겁다. 차량 에어컨도 소용이 없다. 대자연의 기세에 눌린 기계문명은 마지못해 미지근한 한숨을 토해낸다.

태양 아래 감각마저 녹아버린 것일까. 자동차는 쉼 없이 달리는데,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몇 시간째 반복되는 황량한 풍경 탓이리라. 잿빛 대지와 선인장, 필름을 짜 붙인 듯 같은 장면의 연속이다.

네바다와 애리조나 주 경계지역의 후버 댐 근방엔 기울어진 전신주 수 십 개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앞뒤로 동행하는 차량이 없다보니, 방심하는 틈에 규정 속도를 넘기기 일쑤다. 이글거리는 소실점은 다가가면 저만치 꽁무니를 빼며 운전자를 농락했다.

시·공간의 개념을 잃어갈 때 쯤 멀리 꼬리를 문 차량 행렬이 보인다. 네바다와 애리조나 주 경계에 위치한 후버 댐 앞이다. 자세히 보니 전신주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기울어 있다. 뭔가 대형사고가 터진 게 틀림없다. 마침 통제선 사이로 경찰들이 검문을 하고 있다.
 
허리케인? 테러? 지진? 부모님과 함께 여러 가지 추측을 했다. 모두 기우였다. 후버 댐 부근의 전신주는 애초부터 비스듬히 만들었단다. 험한 지형에 따른 맞춤형 설계랄까. 경찰 검문 역시 댐을 통과하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애리조나 주에 진입하자, 사막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조금씩 녹음이 눈에 들어오더니 이내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목적지가 코앞이란 신호다.

'20억년 세월 견딘 협곡 앞에 나는 작아지고'

콜로라도 강줄기가 수억 년에 걸쳐 깎아 만든 세계 최고의 협곡 그랜드캐니언.


사막을 질주한 지 반나절 만에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했다.

콜로라도 고원에 형성된 그랜드캐니언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자연이 빚어놓은 이 예술품은 명성에 걸맞게 웅장하고 화려했다. 깎아지른 절벽과 다채로운 색상의 단층, 기괴한 모양의 암석 등 유네스코 자연문화로서 손색이 없다. 20억 년 세월을 견뎌온 협곡 앞에 서면 인간은 절로 작아진다.

그랜드캐니언의 감동을 뒤로하고 다시 차를 달렸다. 너른 땅 덩이엔 봐야할 것들이 지천이라 지체할 겨를이 없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길목, 또 다른 '역작'을 마주한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캘리포니아 주 중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빙하의 침식이 만들어낸 절경으로 유명하다. 1000m에 달하는 거대한 화강암, 그 주변을 병풍처럼 감싼 침엽수림,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은 폭포(739m)….

빙하의 침식으로 생겨난 요세미티 국립공원. 화강암과 침엽수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공원은 미국인의 기질을 품고 있다.


문득 '미국인의 기질'이 여태 보아온 자연경관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쉼 없이 흐르는 콜로라도 강줄기가 단단한 지표면을 깎아 그랜드캐니언을 만들었듯, 거대한 빙하가 철벽같은 화강암을 잘라내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만들었듯, 미국인 역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북아메리카 대륙을 다듬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탄생시켰다.

샌프란시스코에 다다르자 금문교 눈앞에 우뚝

미국인은 이에 대해 프런티어 정신(Frontier Spirit)의 소산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개척'이란 뜻으로 알려진 '프런티어'는 원래 땅과 땅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1평방 마일 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과의 경계를 잇는 선'을 '프런티어'라 불렀던 것.

당시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몰려든 풍부한 노동력은 척박한 땅을 일구고 도시를 건설하는 등 초강대국의 초석을 다졌다. 이때부터 '개척'이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프런티어'는 미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불가능을 극복하고 지어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미국의 프론티어 정신을 상징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틈에 자동차는 어느새 샌프란시스코에 진입하고 있었다. 때마침 눈앞에 거대한 철골 다리가 펼쳐졌다. 금문교(Golden Gate Bridge)다.

샌프란시스코와 북안 마린반도 사이의 금문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꼽힌다. 거센 조류와 잦은 안개, 복잡한 지형 탓에 건설이 불가능하단 평가를 받은 금문교는 이를 극복하고 4년 만에 완공됐다. 바다 한가운데 철옹성처럼 우뚝 선 금문교는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을 상징하려는 듯 붉은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