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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혁명의 나라 쿠바의 힘은 '긍정'

낡은 건물마다 균열이 무성하다. 노년의 낯에 파인 잔주름 같다. 칠이 벗겨져 잿빛을 띠는 여염집에 너덜너덜한 빨래가 나부낀다. 골목마다 맨발의 아이들이 야구를 한다. 아무렇게나 꺾어 자른 나무작대기와 실밥 터진 고무공이 전부다. 깨지고 갈라진 도로 위로 듣도 보도 못한 자동차가 달린다. 하나같이 수십 년 전 출고된 옛 기종이다.

벽면마다 혁명에 대한 선전구호와 함께 낯익은 얼굴이 새겨져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다. 그 옆으로 반라의 사람들이 시가를 질겅이며 망중한을 즐긴다. 낡은 오디오에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재즈음악이 흐른다.

먼지 뽀얀 흑백 필름 속 장면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쿠바인의 일상이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외딴섬 쿠바는 성장을 멈춘 '피터팬' 같다. 급변하는 세상에 등 돌린 그들의 삶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카리브해에 둘러싸인 만큼 쿠바 어디에서건 옥빛의 바다를 볼 수 있다. 방파제인 말레콘 너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멱을 감고, 살사 춤을 추고 있다.


전 세계 많은 여행자가 쿠바를 찾는다. 디지털 놀음에 지친 이들은 더딜지언정 여유가 묻어나는 옛 정취를 그린다. 일종의 향수다. 게다가 쿠바의 밤은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혹자의 표현처럼 '개도 고양이도 춤추는 나라'다.

이런 이유로 쿠바는 역마살 낀 골수 여행자 사이에서 '성지'로 꼽힌다.

하지만 무턱대고 쿠바를 동경하는 것은 금물이다. 잔뜩 미화된 허상만 좇다 한 보따리 욕을 늘어놓는 여행자를 수없이 봤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빵 한 조각 위해 긴 시간 줄 서지만

정치적 함수에 따라 미국의 적성국이 된 쿠바는 세계 최강국이 취한 금수조치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교통이나 통신 등 인프라는 허술하기 짝이 없고, 나라를 지탱할 만한 산업기반 역시 변변치 않다.


수도 아바나의 구시가지에 국기가 펄럭인다. 낡은 시가지를 걷노라면 시간을 30년쯤 되돌린 듯한 착각이 든다.


수도 아바나의 구시가지에 국기가 펄럭인다. 낡은 시가지를 걷노라면 시간을 30년쯤 되돌린 듯한 착각이 든다.  

쿠바의 궁핍한 현실은 여행자라고 비켜가지 않는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화사용조차 힘든 마당에 외부와의 소통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물자가 귀한 까닭에 하루끼니 때우기가 고역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맛대가리 없는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하염없이 줄을 서야 한다. 관광객 호주머니를 겨냥한 얄팍한 상술에 육두문자가 절로 나온다.

이러니 시가와 모히토(쿠바산 전통술), 팔등신 미녀와 살사, 옥빛 바다와 재즈 등 화려한 유희만을 좇아온 이들은 실망과 분노를 안고 쿠바를 떠난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쿠바의 진면목에 눈을 감은 채 작은 티를 보고 문제를 확대해석하는 격이다. 마치 나무 잔가지에 난 생채기를 보고, 튼실한 기둥을 베어버리는 것처럼.

'긍정의 힘' 늘 콧노래 흥얼대며 밤에는 춤 세계에 흠뻑

분명 쿠바 민중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 돈 2000원에 해당하는 현지화폐(CUP) 50페소면 하루 3끼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 수준이 취약하다.

 

쿠바 어디에서건 '혁명'이란 글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이란 무엇인가'란 글귀가 인상적이다.


쿠바 어디에서건 '혁명'이란 글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이란 무엇인가'란 글귀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저들은 매사에 긍정적이다. 빵 한 조각을 위해 길거리 가판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때도, 공산품을 사기 위해 허름한 가게 앞에서 장사진을 쳐야할 때도, 누구 하나 낯빛을 구기는 일이 없다. 어떤 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른 이는 그 장단에 흥겹게 몸을 흔든다.

밤이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살사와 룸바, 차차차를 추는 쿠바 민중. 그들은 신명나는 허리춤으로 현실의 피로를 말끔히 털어낸다.

쿠바인은 '긍정의 힘'을 믿는다.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미국의 금수조치 등 굴곡의 세월을 겪는 동안 쿠바 민중은 음악과 춤을 통한 살풀이로 더 나은 미래를 그려 왔다.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라'던 체 게바라의 유지를 받들 듯, 쿠바민중은 오늘도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그리며 허리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