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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피라미드 정상엔 바가지 상술이 있었다

여행기를 쓰다보면 종종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쓸 만한 글감이 없거나, 반대로 거리가 넘쳐날 때 그렇다.

기나긴 여정으로 여행 자체가 일상이 돼버린 상황에서 1년 365일 매일이 특별할 순 없다. 팔자 좋게 빈둥거리거나, 혹은 며칠 씩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처럼 딱히 한 일이 없는 경우 마땅한 글 소재를 찾기 힘들다. 머리를 쥐어 짜 본들 글 한 단락 쓰는데 하 세월이다.

반면, 글감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이 얘길 담자니 저 얘기가 아쉽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이래저래 닥치는 대로 쓰다보면 배는 어느새 산으로 간다. 글에 두서가 없다. 횡설수설한 글이 되기 십상이다.

이집트는 어떤가? 후자에 속한다. 쓸 내용이 너무 많다. 이집트를 대표하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수도 카이로 근교의 기자 지구에 있다. 이걸 쓰자니 신전의 백미로 꼽히는 아스완 근교의 '아부심벨'이 걸린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유명한 룩소르 '왕가의 계곡' 역시 외면하기 힘들다. 망자의 저주로 알려진 '투탕카문의 황금마스크'도 아쉽다. '람세스 2세', '클레오파트라', '오벨리스크'도 있다. 모세가 십계를 받은 시나위 산은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의 성지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나일 강'도 써야겠다. 알렉산더 대왕의 흔적이 숨 쉬는 알렉산드리아가 빠지면 섭섭하다.

난감하다. 도무지 어느 것 하나 솎아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글감 모두를 조화롭게 버무릴 깜냥 또한 없다.

이집트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지러이 떠오르던 글감은 의외로 손쉽게 정리됐다. 여정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소재 하나가 '딱' 걸려든 것.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택된 글감은 고대 이집트 문명도, 알렉산더의 대제국도, 모세의 성지도 아닌 이집트인의 '바가지 상술'이다. 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집트의 널뛰는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집트에서 정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호텔, 음식점, 상점, 기차역, 버스터미널, 여행사 등 어디서 무얼 하건 흥정을 통해 값을 치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이집트인은 원래 가치보다 수십 배나 비싼 가격을 부르곤 한다. 어수룩하게 행동하다간 순식간에 여행경비가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람세스2세의 치적을 기린 아부심벨 신전


사실 바가지 상술은 이집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나 네팔,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 흔하게 겪는 일이다. 하지만 앞서 여행한 나라에서 기껏해야 정가보다 2~3배 정도 높은 가격을 부르는 것과 달리 이집트에선 보통이 20배요, 많게는 80배에 달하는 바가지를 경험하곤 한다.

룩소르에서 유적지를 여행할 때 일이다. 한 손에 기념품을 든 장사치가 뒤따라오더니 물품을 건넨다. 돌로 만든 조각인데 괜찮아 보인다. 가격을 물어보니 400EP(EP는 이집트 화폐단위로 1EP가 우리 돈 300원에 해당)를 달란다. 손가락 크기만 한 돌조각이 우리 돈 12만 원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보여준 기념품의 적정 가격은 단돈 5EP였다. 무려 80배의 가격 상승이다.

기념품이야 안사면 그만이라지만 생필품의 경우엔 골치가 아프다. 한날 치약을 사러갔더니, 20EP를 부른다. 한 뼘 크기의 조그만 치약이었다. 이집트 물가를 감안할 때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치약의 원래 가격은 2EP에도 못 미쳤지만, 주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값을 속인다.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택시를 탈 때도 어김없이 가격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나일강을 누비는 무동력 돛단배 펠루카


이집트를 여행하기 전까지 흥정에도 나름의 묘미가 있다고 생각했더랬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현지인과 지갑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가난한 여행자, 둘 사이엔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실랑이 끝에 적정선의 타협이 이뤄지면 어김없이 악수와 포옹이 오간다. '어쨌든' 정가보다 더 받고 판 쪽이나, '그나마' 정가에 가까운 가격에 산 쪽이나 흡족해 하긴 마찬가지다.

여행자는 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무얼 하든 현지인보단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상 저들이 외국인을 상대로 많은 이문을 남기려 한다는 것을.

다행히 현지 물가가 저렴한 까닭에 어느 정도의 바가지 상술은 여행자에게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경우는 다르다. 정가와 판매가의 골이 천 길 낭떠러지만큼 깊다. 그 간극을 생각하면 흥정은 더 이상 '사람내음 풍기는 경제활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