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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멕시코 원주민의 삶, 벽화에 고스란히

사람들은 예술품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전시하길 좋아한다. 그런 까닭에 세상엔 미술관이 지천에 널려있다. 6개월 동안 들른 미술관 수가 손발을 다 합쳐도 못 셀 정도로 많다. 사조별·연대별·나라별…, 아무튼 진짜 많다.

멕시코 산크리스토발 인근의 원주민 마을. 이곳 민중의 삶의 모습이 곧 벽화주의 화가들의 작품 소재였다.


불행히도(?) 나는 그림에 취미가 없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인상파'니 '입체파'니 '야수파'니 하는 사조를 불량서클 이름으로 착각할 만큼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저 그림 앞을 서성이다가 교과서에서 본 유명한 작품을 마주하고 신기해하는 게 고작이다. 저명한 평론가가 쓴 작품해설을 바탕으로 그림의 의미를 곱씹어 보지만, 명화는 범부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안 가면 그만 아니냐고?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거기까지 가서 그 유명한 작품을 안 봤냐는 주위의 타박이 두렵다.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는 여행자의 본능 역시 외면하기 힘들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미술관은 내게 '계륵'같은 존재다. 적어도 이번에 멕시코를 여행하기 전까진 그랬다.

벽화는 기득권을 포기한 화가들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령이다.

 
벽화는 기득권을 포기한 화가들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령이다.  

 
멕시코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진부한 표현을 빌려 그림과 사랑에 빠졌다고나 할까. 나를 매료시킨 건 벽화였다. 수도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처음 벽화를 마주한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요동친다.

여느 때처럼 등 떠밀리듯 향한 박물관. 초입의 미술 전시관에서 벽면 한 가득 그려진 그림을 본 후, 온 몸에 스멀스멀 닭살이 돋았다. 그림이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명화를 숱하게 봤지만, 단 한 번도 이처럼 명확하게 의도를 드러낸 작품은 없었다.

판초, 솜브레로(멕시코 원주민의 전통 의상과 모자)를 입고 쓴 채 말을 달리는 멕시코 원주민과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군대. 메시지는 분명했다. 라틴아메리카를 집어 삼킨 지배층을 향한 민중의 항거를 그린 것이다.
   

멕시코시티의 미술관에서 마주한 벽화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고단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멕시코시티의 미술관에서 마주한 벽화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고단했던 삶을 엿볼 수 있다.

벽화는 살아있었다. 오감을 사로잡을 만큼 생생했다. 거대한 벽을 수놓은 원색이 눈을 붙들었고, 그림 속 민중의 포효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림 속 포연에 코가 시큰거리고, 입이 매웠다. 날카로운 창의 촉감이 느껴져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스페인 식민 지배하에 신음하던 민중의 포효·항거 사실대로 담아내

'누가, 왜 벽에다 그림을 그렸을까', '저것도 미술사조의 한 장르일까', 갖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 길로 나는 멕시코 벽화를 찾아 정신없이 발품을 팔았다.

뒤늦게 알았다. 내가 본 벽화가 멕시코 벽화미술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인 시케이로스의 작품이란 것을. 또한 그 외에도 리베라, 오로스코, 타마요 등 벽화 미술을 진화시킨 다수의 멕시코 화가들이 있단 사실 역시.

20세기 초, 스페인의 식민 지배하에 신음하던 멕시코 민중이 독립을 외치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벽화미술의 거장들이 있었다.

벽화주의 화가들은 캔버스를 던지고, 벽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현학적인 그림을 그리는 대신 민중들이 오가는 거리에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수놓았던 것이다. 기득권을 포기한 그들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다양한 화가의 다양한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는 "우리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이었다. 벽화는 300년 간 서구의 압제에 묻힌 원주민의 정체성을 찾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훌륭한 작품들이 세계 미술계에서 저평가되고 있단다. 수 세기동안 유럽이 미술사를 움켜쥐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놀랄 일도 아니다. 자신들의 만행을 낱낱이 고한 작품에 심기가 불편하기도 하겠지. 서구 화단은 라틴아메리카 예술이 유럽의 모방물에 지나지 않는다며 애써 그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나는 미술을 모른다. 하지만 고집은 있다. 백날 쳐다봐야 그린 이의 의도조차 파악하기 힘든 현학적인 그림보다, 단 한 번의 스침으로 영혼까지 떨리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