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저마다의 색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면 여행자 각자의 경험이 도시의 색을 정한다. 나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빨간색'으로 기억한다.
탱고의 본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어디서건 탱고에 심취한 이들을 볼 수 있다.
여행 6개월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년 여정의 딱 절반을 소화했을 뿐인데, 심신에 쌓인 피로가 꽤나 깊었던 모양이다. 역시 낯선 곳을 떠도는 일이란 쉽지 않다.
나는 스스로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여행 중에 휴가?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여행자에겐 여행이 곧 일상이다. 업무에 시달린 직장인에게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듯 여독에 찌든 장기여행자 역시 적절한 시기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자유분방함을 잘 드러내는 거리의 조각상.
가장 먼저 취침과 기상 시간에 대한 속박을 풀었다. 온종일 숙소에서 하릴없이 뒹굴 거리다가 늘어지게 잤다. 주홍글씨처럼 아로새겨진 피로를 지우기 위해 자고 또 잤다.
숙면과 함께 식사에도 신경을 썼다. 빵 조각이나 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워온 터라 여행 6개월 만에 몸무게가 10kg가까이 줄었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선택한 메뉴는 쇠고기. 웬 호사냐 반문하신다면 오산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쇠고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싸다. 우리 돈 3000원이면 질 좋은 안심과 등심 살코기 1인분(400~500g)을 너끈히 살 수 있다. 고기질은 십 수 만 원을 호가하는 한국 레스토랑의 쇠고기 스테이크 부럽지 않다.
'빨간' 육질 위에 눈꽃처럼 퍼진 마블링,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는 쇠고기를 먹었다. 스테이크에 지치면 아르헨티나 전통 쇠고기 바비큐인 아사도를 즐겼다.
쇠고기엔 늘 와인을 곁들였다. 역시 우리 돈 2000원이면 양질의 '신의 물방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잔에 한 가득 담긴 '빨간' 와인은 심신에 깃든 여독을 녹였다.
값싸고 품질 좋은 아르헨티나 산 쇠고기와 와인은 가난한 배낭여행자를 흐뭇하게 했다. 문화의 도시답게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곳곳에는 행위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쇠고기와 와인을 먹는 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왜 이토록 값싸고 품질 좋은 아르헨티나 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을까? 게다가 아르헨티나에서 사육하는 소는 광우병 위험이 전혀 없지 않은가. 이곳에선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청정한 풀을 뜯는 소떼를 쉽게 볼 수 있다. 광우병의 원인인 동물성 사료는 먼 나라 얘기인 셈. 미국도 광우병 위험을 인지한 직후 아르헨티나 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는 마당에 정작 우리는…, 아무튼 세상엔 소시민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참 많다.
먹고 자는데 지치거나, 무료함이 찾아올 때면 시내에 탱고 공연을 보러 나갔다. 물론 공짜다. 탱고의 본고장답게 부에노스아이레스 어디서든 쉽게 탱고를 접할 수 있다. 노천카페, 공원, 길거리 할 것 없이 4분의 2박자의 탱고선율에 맞춰 몸을 섞는 커플이 지천에 널렸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허벅지까지 갈라진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성과 새하얀 셔츠에 '빨간' 장미를 입에 문 남성의 몸짓, 탱고는 역시 정열과 매혹의 춤이었다.
쇠고기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마시고, 탱고를 보는 동안 열흘은 쏜살같이 흘렀다. 잘 쉬고, 잘 먹은 덕에 볼과 배에 살집이 올랐다. 피로가 걷힌 자리에 희미해져 가던 역마살이 들어찼다. 붉은 도시를 떠나 다시금 길 위로 나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