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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세계의 끝에 선 기분을 아시나요?


세계의 끝, 우수아이아에 왔다.

세계의 끝이라…, 어감이 참 멋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수아이아는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의 끝'이라 해야 옳다. 바다 너머 남극이 있기에 우수아이아가 세계의 끝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덕지덕지 토를 단 정의는 운치가 없다. 세계의 끝, 얼마나 간결하고 낭만적인가.

우수아이아 남단에 위치한 우체국. 세계의 끝자락에서 보내는 편지 한통이 운치를 더한다.

우수아이아는 파타고니아 최남단에 자리한 작은 도시다.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의 남쪽 지역으로, 세계에서 남극과 가장 가까운 대륙이다. 고로 '우수아이아=세계의 끝'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여정을 앞두고 우수아이아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도대체 세계의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은 살까? 듣도 보도 못한 괴 생명체가 있진 않을까? 날씨가 혹독한 거 아닐까?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거 아닐까? 사막이나 황무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지 않을까?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들은 하나같이 엉뚱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탓이리라. 다소 염세적인 이 작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세계의 끝을 불완전한 곳으로 묘사해 놓았다. 그림자를 잃은 사람들, 일각수(뿔 달린 말, 유니콘)…, 뭐 이런 요소들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계의 끝을 달리는 녹색·빨간색의 미니기차가 앙증맞기 그지 없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설렘으로 이어졌다. 우수아이아행 비행기를 손꼽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신비의 땅에 발을 디뎠다.

애석하게도 상상의 날개는 공항 청사를 나서는 순간 퍼덕거리던 날갯짓을 멈췄다. 세계의 끝은 그저 평화롭고 조용한 동네였다. 살짝 부아가 치밀어 생떼를 부렸다.

"이 봐요 하루키 씨! 세계의 끝이라고 뭐 특별할 게 없잖아요. 그냥 사람 사는 동네군요. 뿔 달린 말도,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이런저런 몽상에 빠진 채 동행을 기다렸다. 우수아이아로 오기 직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 또래의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는데, 목적지가 같아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것. 비행시간이 엇갈린 탓에 먼저 도착한 나는 공항 로비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탈리아 친구 엘리자와 한국인 동행 재현. 옷깃이 스친 연으로 동반자가 됐다. 세계의 끝과 어울리는 기묘한 만남이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돌아보니 집 채 만 한 배낭을 두른 서양 여자 애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녀는 함께 여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재현, 엘리자, 셋의 동행이 시작됐다. 일면식도 없던 이들과의 기묘한 만남, 세계의 끝과 딱 맞아떨어지는 설정이다.

마을은 고즈넉했다. 바람 한 점 없는 해안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여염집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거울처럼 투명한 호수는 하늘과 산, 배를 수면 위에 담아냈다. 소싯적 미술시간에 배웠던 '데칼코마니' 같다. 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칠하고 이를 반으로 접었다 펴면 똑같은 모양이 나오던.

머물던 숙소에서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한 히피 청년이 말하길 우수아이아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산파블로'라는 곶이 있는데, 그 풍광이 예술이란다. 교통편이 마땅찮아 여행객의 발길이 뜸한 곳이기도 하단다.

세계의 끝 중에서도 끝인 산파블로 곶. 난파된 배가 파도에 휩쓸리는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그 길로 차를 빌렸다. 곶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개발이 덜 된 터라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 수 십리나 이어졌다. 차로 한참을 들어가자, 드문드문 보이던 차량과 인적이 뚝 끊겼다. 멀리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 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 소리쳤다.

"맙소사, 진짜 뿔 달린 말이 있네."

야생동물에 관심이 많던 엘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저건 낙타과에 속하는 과나코라는 동물이야."

유니콘이 아니면 어떠랴. 어쨌든 세계의 끝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생경한 풍경인 것을.

얼마 후 우리는 차에서 내려야 했다. 곶의 끝에 도착한 것이다. 지도를 뒤적거리던 재현이가 말했다.

"여기가 진짜 세계의 끝이야. 막다른 길이라고."

바다 위에 난파된 배 한 척이 표류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녹슨 철 덩어리를 요리조리 흔들어 대는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우리 셋, 유니콘을 닮은 과나코, 죽은 배 한 척…, 영락없는 세계의 끝이다.


지구별 단상

<보낸 곳 : 우수아이아 땅 끝 우체국>

"편지 왔습니다."

"어디서 온 편지죠?"

"세계의 끝이요."

"그런 곳에 우체국이 있나요?"

"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편지를 씁니다. 심지어 편지를 보내려고 세계의 끝을 찾는 이도 있답니다."

"왜죠?"

"글쎄요. '끝'이 주는 상징성 때문 아닐까요? '끝'의 또 다른 이름은 '시작'이니까요. 세계의 끝도 달리 보면 세계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시작은 희망을 의미하죠. 땅 끝 우체국은 어떤 종류의 희망이든 배달해 주는 '무진장(無盡藏)의 곳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