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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에콰도르의 불평등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지구 자전축과 직각을 이루는 위도 0도의 선', 적도다.

역시 딱딱한 용어를 사용한 정의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쉽게 설명해 보자.

스케치북에 지구를 그린 후 이를 반으로 접을 때 생기는 종이 자국, 지구본의 어느 한 가운데 굵은 펜을 갖다 대고 빙그르르 돌릴 때 그려지는 선, 지구 정중앙을 가르는 선이 적도란 얘기다.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원주민 비율이 높은 에콰도르. 하지만 패권주의의 희생양이 된 원주민의 삶은 고달프다. 키토 구시가지에서 전통춤을 추는 여인네의 치맛자락이 구슬프게 휘날린다.

스페인어로 에콰도르(Equador)는 적도를 뜻한다. 남미 북서부의 작은 나라 에콰도르는 국명에서 알 수 있듯 적도에 자리하고 있다.

'위도0도 적도에 위치한 그곳은 아마 덜함과 더함이 없는 평등함을 간직하고 있겠지?'

적도는 치우침이 없다. 북극점과 남극점 사이에서 지구를 정확히 두 개의 반구로 나눈다. 위도 0도…, 덜함과 더함이 없는 숫자 0처럼 적도는 공명정대한 선이다.

스페인 풍의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에콰도르. 사진은 키토 구시가지의 대성당.


그래서일까. 에콰도르에서 불평등을 감지하고서,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종·횡을 공평하게 가르는 적도국이건만, 그 속에 내재된 민중들의 삶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마치 굳게 믿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도착했을 때 생경한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다. 물론 도시의 겉모습은 3개월 동안 보아온 다른 남미 국가와 다를 바 없었다. 스페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대성당과 국회의사당, 유럽풍 광장과 골목 등 키토는 눈에 익은 전형적인 콜로니얼(식민) 도시였다.

내가 낯설게 느낀 건 다름 아닌 '사람들'이었다. 지금껏 칠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에콰도르에서처럼 많은 수의 원주민을 본 적이 없다. 백인 비율이 높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선 이곳이 유럽이 아닌가하는 착각마저 들었더랬다.

행상 원주민의 모습에선 고단함이 묻어난다.

에콰도르는 달랐다. 순수 원주민의 비율이 25%로, 국민 4명 중 1명이 잉카의 후예였다.

거리 곳곳에서 전통 복장을 입고, 고유 언어인 케추아어로 얘기하는 원주민을 보니 가슴이 설렜다.

오래지 않아 설렘은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원주민의 고단한 삶을 오롯이 느꼈기 때문이다. 볕 좋은 날 구시가지의 한 광장. 망중한을 즐기는 동안 나는 수십 명의 원주민과 마주했다.

아이를 들쳐 업은 채 필사적으로 수제품을 펼쳐놓던 아낙, 먼지가 뽀얗게 쌓인 엠빠나다(남미 고유의 음식, 만두와 비슷함)를 들이밀던 남자, 새까만 고사리 손을 내밀며 구걸하던 아이들, 모두 남루한 행색의 원주민이다.

아낙은 30분이 지나도록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번번이 거절하기 미안해 펼쳐 놓은 물건을 집어 드는 순간, 여기저기서 다른 행상들이 몰려들었다. 제 것을 사라고 아우성치는 통에 결국 아낙의 물건을 사주지 못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등에 업힌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지만 가난과 싸우고 있는 잉카 후예들의 삶은 결코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늦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문 앞이 소란스럽다. 식당 주인이 한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듯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사내가 초콜릿이 가득 담긴 광주리를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막아섰다. 손님들에게 초콜릿을 팔려다 문전박대당한 이 사내 역시 원주민이다.

16세기,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지휘하는 침략군이 잉카문명을 집어 삼킨 이래, 잉카의 후예들은 지배자의 핍박과 억압 속에 숨죽여 살아야 했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원주민은 고단한 삶을 대물림하고 있다. 인간사는 약자에게 한없이 가혹하다.


에콰도르에서는 계란이 선다. 과학에 문외한인지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중력과 관계가 있단다. 아무튼 많은 여행자들이 적도가 지나는 산안토니오 마을을 찾아 계란을 세운다. 심지어는 못 머리 위에서도 계란이 선다.

원주민은 계란과 닮았다. 그들은 쉽게 깨지고 상처 받는다. 식단의 언저리에 오르는 계란처럼 원주민의 삶도 늘 주변부에서 겉돈다.

좀처럼 세우기 힘든 계란이 적도에서 섰다. 잉카의 후손들 역시 언젠가는 우뚝 서리라 믿는다. 아니 그러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