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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시리아 여행에서 편견의 무서움을 알았다

편견은 잔인하다. 대상을 생각의 틀에 가둔 채, 멋대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자, 특히 언론처럼 공신력 있는 기관을 맹신할 경우 편견의 벽은 더욱 견고해 진다.

한 번 굳어진 편견은 좀체 무너지지 않는다. 마치 딱딱한 껍데기에 쌓인 견과류 같다. 그 외벽을 깨기 위해선 커다란 충격이 필요하다. '망치'로 호두 껍데기를 두드리듯, '경험'이란 공이로 힘차게 두드려야 한다.

돌이켜 보면, 시리아 여행은 내 머릿속 호두 껍데기를 부수는 과정이었다.

마을 어귀의 모습이 우리나라 70~80년대 시절을 연상케 한다.



'악의 축' 선입견으로 시작한 여행
현지인의 따뜻한 마음 몸으로 느껴

서구 언론의 편향된 보도와 이를 여과 없이 전하는 국내언론에 익숙한 탓에 시리아 여행을 앞두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악의 축', '불량국가', '인권 사각 지대' 등 타자로부터 주입된 살벌한 이미지가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터키의 국경도시 안타키야에서 육로를 통해 시리아 측 알레포로 넘어오는 내내 흉흉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끌려가 개종을 강요당하거나,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당한 후 갖은 고문에 시달리는 처지에 놓이곤 했다.

머리를 흔들어 도리질 쳐보지만, 망상은 쉬 물러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리아 국경을 통과한 버스가 길 한 편에 정차하고 있었다. 곧 차장이 낯선 아랍어로 뭐라 뭐라 소리친다. 사람들이 짐을 꾸리더니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현지인만 가득한 탓에 영어가 통하질 않았다.

상황으로 짐작건대 여기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라는 말인 듯 했다. 다른 이들의 꽁무니를 쫓아 밖으로 나오자, 황토 빛 중동 풍경이 시선을압도했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만난 아이들은 해맑은 미소로 이방인을 환대했다.


간이 정류소엔 변변한 의자 하나 없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기약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지평선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는데,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운전자가 차에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덜컥 겁이 나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무안한 듯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두 번째는 트럭이다. 여지없이 나는 험한 인상으로 손사래를 쳤다.

얼룩진 창으론 풍경을 볼 수 없어

버스를 기다리는 30분 동안 스무 대가량의 차를 상대로 같은 일을 반복했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이 낯선 이방인을 도우려 했다는 사실을. 저물녘 허허벌판을 서성이는 내게 대가없이 차편을 제공하려던 것을. 괜한 의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국경에서 마주한 시리아인의 호의는 시작에 불과했다. 알레포와 하마,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나는 현지인의 따뜻한 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시리아 중부 도시 하마의 풍경.

국경도시 알레포에 자리한 모스크.


하마에선 단 한 번도 버스나 택시를 이용한 적이 없다. 손짓만 하면 지나가던 차량이 멈춰 선다. 같은 방향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를 태워다 준다. 커피나 차를 돈 내고 마신 기억도 별로 없다.

거리를 걷다보면 발길을 붙잡고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상점 주인이 지천이다. 행여나 길이라도 물어볼라치면 서로들 데려다주겠다고 아우성이다. 동양인이 낯선 아이들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웬일인지 흘끔거릴 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수줍은 탓이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눈길이 마주치면 세차게 손을 흔든다. 그 모습이 해맑다.

여정을 통틀어 가장 착한 민족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시리아인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내게 베푼 환대와 호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이들에게 '악의 축'이란 주홍글씨를 새겼다. 특정 세력에게 쓰일 법한 용어가 한 나라를 통째로 옭아맸다. 그 때부터 이 나라 국민 전체가 악의 무리처럼 여겨졌다. 시리아를 여행하기 전 내 속에 자리하던 편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위정자들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선량한 시리아인은 하루아침에 폭력적인 민족으로 낙인찍혔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리아를 여행한 후 나는 편견의 무서움을 새삼 깨달았다. 일방으로 전해지는 정보에 매달려 왜곡된 시선으로 시리아를 바라봤단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얼룩진 창으론 제대로 된 풍경을 감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생각의 창에 덕지덕지 붙은 편견의 때를 벗겨 낼 때 비로소 창 너머 진실이 보인다. 시리아가 내게 준 소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