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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야생사자를 보니 인간의 욕심이 부끄러웠다

녀석은 용의주도하다. 수풀에 바짝 엎드린 채 꼼짝하지 않는다. 바람결에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지 어쩌다 코를 킁킁거릴 뿐이다.

우리 역시 신중하긴 마찬가지. 녀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차량 옆 창문에 붙은 마흔 네 개의 눈동자는 깜박거림조차 잊은 채 한 곳을 향해 있다. 숨소리마저 죄악이다. 지독하게 고요하다.

30분째다. 아이 키 만 한 갈대숲을 사이에 두고 '금수의 왕' 사자와 '영장류의 최상층부' 사람 간의 기 싸움이 팽팽하다. 전선은 2m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 형성돼 있다. 지구력이 관건이다. 녀석은 우리가 떠나길, 우리는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느 한 쪽은 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남부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동물서식지인 나미비아 에토샤 국립공원에 온 지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동물을 봤다. 영화 <마라톤>의 주인공 초원이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얼룩말을 비롯해 기린, 톰슨가젤, 임팔라, 스프링복, 타조, 자칼, 오릭스, 야생멧돼지, 독수리, 하이에나 등이 에토샤를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얼룩말 부부의 사랑.


그네들은 우리를 열광시켰다. 끝 간 데 없이 너른 초원을 달리다 물웅덩이에서 자맥질을 하는 야생동물을 발견할 때마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동물을 소재로 한 영상물이야 인간의 입맛대로 가공되기 일쑤지만 이곳엔 꾸밈이 없다. 동물원 철장 속 금수에게 채워진 속박의 굴레도 없다. 모든 게 진짜다. 어떤 종류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이유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에토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모두의 마음이 뒤숭숭하다.

뒷간에서 일 처리를 확실히 못한 것처럼 뒤가 개운치 않다. 아직 사자를 못 본 탓이다.

사파리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맹금류를 호령하는 사자를 마주하는 일일게다. 주로 밤에 사냥하는 사자는 웬만해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경계심 많은 녀석이 사파리가 이뤄지는 새벽이나 낮 시간대에 수풀이나 나무 둥치에 몸을 숨기기 때문.

남부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에토샤 국립공원은 수많은 동물들의 터전이다.

탐사 팀은 에토샤를 떠나기 직전 행한 마지막 사파리에 기대를 걸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사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끝나는 시간이 다가올 즈음 팀장 가이드 타바니가 입을 뗐다. 목소리에 힘이 없다.

"이번 탐사에선 사자를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에게 운이 따르지 않는 모양…."

"사자다!"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누군가 소리쳤다. 이목이 집중됐다. 먼발치 수풀 사이로 샛노란 갈기가 흩날린다. 수사자다. 캠핑차 안이 술렁였다. 타바니가 모두에게 주의를 준다. 극도로 민감한 사자를 자극하지 말란다. 이내 차 안에 정적이 감돈다. 우리를 태운 마릴린은 조용히 사자에게 다가갔다. 첫 대면이다. 하지만 녀석은 쉽사리 그 자태를 내보이지 않았다.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도무지 승패가 나지 않을 것 같던 기 싸움에 변화가 일었다. 사자 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뒤척이던 녀석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우리 쪽을 바라보더니 우렁차게 포효한다.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차량 안이 다시 떠들썩하다. 스무여 대의 카메라가 사자를 정조준한다.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오래도록 수풀에 숨어있던 수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온킹'의 심바처럼 위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린 녀석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영화 <라이온킹>의 주인공 심바를 닮았기에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녀석은 바위산 꼭대기에 올라 동물들을 굽어보던 영화 속 심바의 위엄을 지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심바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고리모양의 눈과 얼굴을 뒤덮은 갈기가 강한 인상을 풍겼다. 마릴린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녀석은 풀숲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주위에 있던 초식동물들이 놀라 사방팔방으로 뛴다.

모두들 역동적인 사냥 장면을 기대하며 숨을 죽였다. 하지만 심바는 달아나는 임팔라 무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심바는 지금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젯밤 사냥에서 고기를 섭취한 모양이지요. 이곳 야생에선 결코 쓸데없이 사냥하는 일이 없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얻고 더 이상은 욕심내지 않지요."

가이드의 말이다.

에토샤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들른 힘바부족의 사람들.

우리는 숲 속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심바의 흔적을 좇았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에토샤를 떠날 수 있었다. 심바를 마주한 까닭에 예정보다 늦게 국립공원을 빠져나왔다. 지평선 너머 지는 해가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초원은 검은 융단을 덮어 놓은 것처럼 어두웠다. 상념에 잠기기에 분위기가 그만이다.

나는 심바를 떠올렸다. 딱 필요한 만큼만 사냥을 한다는, 그 이상은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녀석을 말이다. 어쩐지 그의 포효가 호통처럼 느껴졌다. 덕지덕지 욕심이 들어찬 내 마음을 녀석은 알고 있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아프리카 초원 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부끄러워 빨개진 낯빛을 가려줄 만큼 충분히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