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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

 

                                                                            <인도 델리의 만수>

흔히들 한류(韓流)의 무대하면 중국, 대만,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만을 떠올린다. 용어 자체가 이 지역에 불어 닥친 한국 대중문화 열풍에서 비롯됐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부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류가 세계 곳곳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넘실거리고 있단 얘기다. 지난 1년의 여정을 통해 느낀 바, 한류는 동아시아를 넘어 맹렬히 서진 중이다. 인도를 거쳐 중동 모래바람을 타고 유라시아의 가교 터키까지. 이 뿐이랴. 이집트를 거점으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 초입에 상륙한 한류의 기세는 등등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한류에 대한 개념 확장이 필요하다. 서쪽의 한류는 동쪽의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한류가 가수와 배우 등 한국 연예인의 인기를 바탕으로 한 ‘대중문화 열풍’을 의미한다면, 서진 중인 한류는 한국 여행자를 겨냥한 현지인의 ‘마케팅 열풍’을 의미한다. 동 한류가 한국 문화의 해외진출로 이뤄진 인위적인 현상이라면, 서 한류는 한국 여행자의 객심(客心)을 잡으려 현지인이 일으킨 자발적 현상이다.


먼저 인도를 보자.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자신을 ‘만수’라 소개하는 현지인을 많이 만나게 된다. 델리, 아그라, 카주라호, 바라나시 등 한국인 여행자가 몰리는 도시에는 어김없이 만수가 넘쳐난다. ‘왜?’, ‘언제?’, ‘어떻게?’ 만수라는 예명이 쓰이기 시작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추측은 가능하다. 한국인을 상대하던 인도 관광업 종사자에게 누군가 푸근한 이미지의 만수라는 별칭을 붙여줬을 테고, 덕분에 그는 한국 여행자 사이에 유명인사가 됐으리라. 이에 수천 킬로 떨어진 도시까지 ‘만수 마케팅’이 퍼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수도 뉴델리의 여행자 거리인 빠하르간즈 골목에 조그만 상점이 있다. 이 가게의 주인 역시 만수다. 입구에 ‘만수네 짜이집’이라는 한글 간판이 떡하니 걸려있다. 만수는 한국인의 정서를 간파하고 있다. ‘에누리’는 기본이요, ‘덤’을 제공하고 ‘애프터서비스’도 확실히 해준다. 나이에 상관없이 남자에겐 ‘형’, 여자에겐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 친근함을 더한다. 어설픈 한국말로 농담도 곧 잘한다. 이러니 한국 여행자들은 거리가 멀더라도 웬만하면 ‘만수네 짜이집’을 찾는다. 만수의 성공에 자극받은 주변 상점들이 하나 둘 한글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만수의 아성을 쫒기에 힘이 부쳐 보인다.


힌두교 성지인 바라나시의 만수는 어떤가. 강가(갠지스강)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조각배를 태워주는 만수 역시 자칭 지한파다. 동틀 무렵과 해질녘 강가의 신성한 일출∙일몰을 보려 강어귀로 나오면 어김없이 수 십 명의 조각배 호객꾼들이 붙는다. 서로들 자신의 배를 타라고 아우성이다. 어지러이 날아드는 영어와 인도어 사이에, “나 만수에요. 만수배 타요”하는 다소 어눌한 발음의 한국말이 들려온다. 만수다. 타국에서 그것도 현지인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우리말이 그저 신기하고 정겹다. 왠지 모를 신뢰감에 호객꾼을 비집고 만수 배에 오르게 된다.


한국 여행자의 객심을 잡는 보증수표인 만큼 인도의 관광업 종사자들은 너도 나도 만수로 개명(?)하고 있다. 자연히 만수들 사이에선 진위 논란이 한창이다. 서로 자신이 원조라 주장하는가 하면, 상대가 짝퉁이라며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바라나시 만수가 카주라호 만수와 ‘맞장’ 떴다는 미확인 소문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 뼈 속까지 만수가 되기 위해 이들은 우리말을 독학하고 한국 문화와 정서를 배우려 노력한다. 자발적으로 한류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인도에 만수가 있다면 중동에는 지한파로 통하는 ‘한류 4대 천왕’이 있다. 이집트(지리상 북아프리카지만, 아랍국가란 특성상 중동으로 분류)의 ‘만도’와 요르단의 ‘지단’, 시리아의 ‘압둘라’, 터키의 ‘헥토르’가 그들이다.


이집트의 만도는 ‘4대 천왕’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파라오의 무덤 ‘왕가의 계곡’으로 유명한 룩소르에서 만도는 다양한 일을 한다. 요식업과 숙박업, 투어가이드 등 굵직한 일을 비롯해 기차표 예약이나 물품구입 등 여행객 편의를 위한 자질구레한 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물론 그의 손님은 모두 한국 여행자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룩소르의 모든 길은 만도로 통한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독학했다고는 믿기 힘들만큼 훌륭한 한국어 실력과 한식 요리솜씨는 그가 한국인의 마음을 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방증한다.


시리아 하마의 숙박업소에서 매니저 일을 하는 압둘라 역시 한국인 여행자 사이에서 유명하다. 한국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그는 사람 됨됨이 하나로 객심을 사로잡은 경우다. 먼저 요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손님 뒤치다꺼리에 여념 없는 그는 ‘손님이 왕’이어야 하는 한국정서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다. 요르단 와디럼 사막투어의 지단과 터키 페티에의 헥토르 역시 그들만의 노하우로 한국 여행자를 섭렵하고 있다.


지구촌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본 결과, 이렇듯 특정 국가의 여행자를 겨냥한 마케팅의 대상은 한국이 유일하다. 우리 보다 훨씬 오랜 세월 여행 인프라를 구축해온 유럽이나 북미, 일본을 상대로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현지인을 본 적이 없다.


왜 일까? 나름 고심 끝에 결론을 냈다. 한국은 해외여행의 족쇄가 풀린 지 올해로 고작 20년이다. 허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선진국에 수 십 년이나 뒤졌지만, 한국의 해외여행자 수는 단 기간 내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여행자는 넘쳐나건만, 이미 여행 노하우가 쌓인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여행 정보는 빈약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인 여행자의 여행 경로는 경험자의 수기에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앞서 여행한 이가 ‘이집트 룩소르에 갔더니 만도라는 사람이 알아서 해주더라’는 정보를 주면, 많은 이들이 같은 방법으로 여행을 한다는 얘기다. 현지 관광업 종사자들에게 한국 여행자는 무주공산이자, ‘무진장(無盡藏)의 곳집’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