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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한국은 구제불능한 나라라더니...

 

외국을 여행하다 한국인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국의 낯선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혼자 방황하던 ‘나 홀로 여행자’라면 내 나라 사람을 마주하는 기쁨은 배가된다. 아직 한국 여행자가 많지 않은 남미나 아프리카 등 오지에서 한국인끼리 만날 경우 옷깃이 스치는 순간 호형호제 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일단 통성명이 끝나면 한국 배낭족들은 그간 여행하며 겪은 설움을 토로하고 맞장구치며 서로를 위로한다. ‘외국어 울렁증’ 탓에 단내 날 정도로 닫혀 있던 입들은 쉴 새 없이 한국어를 쏟아낸다.


이야기 도중에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아무개 씨들이 있다.

“내가 어디를 여행하다, 무슨 실수를 했는데 너무 창피했다. 외국인들이 다 쳐다보는 통에 ‘쓰미마생’하고 일본인인 척 했다.”

“나도 여행 중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쳐다보는 현지인들에게 ‘니하오’하고 중국인인 척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농 섞인 얘길 터. 면 팔릴 일이 있을 땐 겉모습만 보고는 한중일 삼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일본인 혹은 중국인 행세를 하는 게 애국하는 길이란 우스갯소리다.


얘길 듣다보면 문득 궁금증이 밀려온다. 여행자들이 종종 얼굴이 붉어질 만큼 부끄러운 실수를 한다는 말인 즉 배낭족에게도 분명 지켜야할 윤리가 있다는 것. 도대체 여행자 윤리란 뭘까? 그 나라의 법과 관습 지키기, 유적지나 유물 훼손하지 않기, 나와 다른 종교 존중하기, 뭐 이런 것들이 되지 싶다.


위에 언급한 윤리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식상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촌 곳곳의 문화 ‘엿보기’가 일상화된 지금, 대부분의 배낭족들은 이런 윤리들을 잘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굉장히 중요함에도 대부분의 여행자가 당연한 듯 무시하는 윤리가 있다. 선입견으로 얼룩진 눈으로 타 민족을 재단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지구촌에는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이 너무도 많다. 문명과 담을 쌓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자면, 가슴 한편이 찌릿하다. 인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목격한 삶의 현장은 처절했다. 수년째 이어진 가뭄으로 물이 부족한 탓에 사람들은 고육지책으로 우물 바닥에 고인 썩은 물을 펐다. 수도공급은 꿈같은 일이다. 수인성 전염병으로 아이들의 손발은 곪아터졌다. 마을에선 문명화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소달구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많은 이들이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신발을 신은 이를 찾기 힘들다. 거리 한편에 거적을 깔고 자는 이가 지천이다.


남아메리카는 어떤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의 개발도상국에는 빈민가가 참 많다. 거리를 걷다보면 마약을 들이밀거나 성을 파는 이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불안정한 통화 탓에 은행에서 환전하는 것보다 거리의 불법 환전이 유리한 나라가 다수다. 빈곤함은 공직자의 부정을 부추긴다. 베네수엘라에서 만난 부패한 경찰, 이유 없이 짐 검사를 반복하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던 그들을 떠올리면 두고두고 입맛이 쓰다. 에콰도르에서 만난 잉카후예들은 하나같이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미비아로 넘어가는 도로가엔 차를 얻어 타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흡사 피난을 떠나는 난민의 모습이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역 주변에선 노상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 없는 추레한 배낭여행자도 그들 눈에는 ‘배부른 돼지’로 보인다. 돈이 없던 나는 그날 맨발신세를 면치 못했다. 네팔 어디쯤에서 산 값싼 신발을 그들은 감지덕지하며 벗겨갔다. 그나마 아프리카에서 잘 산다는 남아공이 이렇다.


이처럼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개발도상국을 여행하는 배낭족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들은 왜 이토록 가난할까?”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때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여행자는 없다. 우리는(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행자) 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그들 문화에서 비롯된 기질과 연관시킨다. 이런 판단은 객관적 근거보다는 미디어나 책 등 타자로부터 주입된 선입견을 바탕으로 한다.


예컨대 인도가 가난한 이유를 우리는 그들 삶을 관통하는 힌두교 떄문이라고 단정 짓는 경향이 있다. 카스트제도라든가 미신적 요소가 짙은 종교의 특성이 인도 경제를 후진적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남미의 후진성을 탓할 때는 흔히들 놀기 좋아하는 ‘한량 기질’에 혐의를 둔다. 내일에 대한 계획이나 투자 없이 그저 오늘 하루를 즐기는데 혈안이 된 호모 루덴스(유희인간)적 유전자가 발전을 저해한다고 재단한다. 아프리카의 경우 선천적으로 게으른 국민성이 빈곤함을 벗지 못하는 이유라고 속단한다.


이런 선입견은 오래도록 지구촌 패권을 장악해온 서구에서 비롯됐다. 17, 18세기에 걸쳐 세계지도를 펴놓고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며 개발도상국들을 식민화했던 유럽 열강의 시각인 것이다. '문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주장은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일까?


장하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문화주의의 한계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강대국이 제도화한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파헤친 이 책에서 장 교수는 ‘9장 게으른 일본인과 도둑질 잘하는 독일인’을 통해 문화주의와 경제발전의 필연성을 경계하고 있다.


장 교수는 “문화는 변화한다. 많은 문화주의자들이 은연중 전제하는 것처럼 문화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며 “경제 발전에 확실하게 좋거나 나쁜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그는 독일과 일본, 한국 등을 예로 들고 있다. 19세기 중반 독일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 있기 전 영국인들은 독인인을 ‘둔하고 굼뜨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로 정의 내렸다. 또 일본이나 한국 역시 유교라는 전근대적인 사상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지금의 평가는 어떤가? 둔하고 굼뜨고 정직하지 못하다던 독인인들은 철두철미하고 차분한 민족으로 변모해 있다. 전근대적 사상으로 경제발전에 걸림돌이라던 동아시아의 유교는 오히려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가치들을 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한 마디로 이들 나라의 경제발전을 전후로 해 문화주의자의 평가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는 얘기다. 이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장 교수는 개발도상국의 후진성은 온전히 문화적 기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열악했던 경제환경이 안고 있는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경제 환경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면 해당 국가 사람들의 기질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장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지금 개발도상국들이 처한 열악한 경제환경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따지는 일이 가난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언급했듯 개발도상국 대부분은 서구열강, 정확히 유럽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의 착취는 오랜 시간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자립을 방해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후진성이 그들의 기질 탓이라는 가해자의 주장은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려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개발도상국의 가난을 문화적 기질 탓으로 여기는 것은 가해자인 서구 열강의 ‘책임회피’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이며, 피해자인 개발도상국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여행자의 시각이 흐려질 때 한 사회가 처한 현실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행자에게도 지켜야할 윤리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