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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한국 청양고추의 자존심을 걸고 멕시코인과 매운맛 대결

세계일주증후군’의 여파로 무직 증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발적 백수라 딱히 조급하거나 초조하진 않네요. 다만 함께 놀 이가 없어 조금 적적합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입에 단 내 날 정도로 혼자다녔으니 말이죠. 방바닥을 구르다 그것도 싫증나면 제 보물 상자를 열어봅니다.  5대양 6대주가 오롯하게 담겨 있습니다. 구석에서 일기장을 꺼내듭니다. 1년 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탓에 꼬질꼬질하기가 ‘거지발싸개’ 수준입니다. 외양이야 어떻든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청년백수의 기를 살려주기에 충분합니다. 일기장에서 몇몇 글들을 발견합니다. 분명 직접 쓴 글이건만 낯섭니다. 여행 중 다니던 신문사에 연재를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그때 발탁한 ‘주연’들 말고도 ‘보조출연자’들이 여럿 있었나 봅니다. 알아보기 힘들게 휘갈긴 걸로 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들을 끼적여 놓은 듯합니다. 뒤늦게야 그들을 챙깁니다.

추억의 부스러기 두번째 이야기, 멕시코 편


 “누렁아!”

곁눈질 한번 하더니 녀석은 고개를 돌린다. 흘겨보는 모양새가 영 기분 나쁘다. 슬쩍 부아가 치민다. 먹다 남은 타코 조각을 던졌다. 반응이 없다. 다시 한 조각. 녀석은 귀찮은지 몸을 일으켜 저만치 떨어진 그늘로 자리를 옮긴다.

그랬다.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했다. 2시간 전에 시켜 딱딱하게 굳어버린 타코 주변에 파리가 들러붙는다. 새로운 놀이가 생각났다. ‘맨손으로 파리잡기’, 예전에 군대에서 침상 바닥에 앉은 파리를 상대로 곧잘 하던 놀이다. 살짝 오므린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잽싸게 바닥을 쓸면 주먹 속에 파리가 산채로 잡힌다. 주먹 속에서 웽웽 거리는 놈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 그 충격에 바둥거릴 뿐 달아날 생각을 못한다. 그렇게 생포한 파리 십 수마리가 지금 테이블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수도 멕시코시티를 떠나 푸에블라, 와하카, 팔랑케를 거쳐 이곳 산크리스토발에 왔다. 2주 동안 쭉 혼자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였던 적은 처음이다. 짧게나마 동선이 비슷한 여행자들과 함께 여행하곤 했더랬다. 사람이 그리웠다.

턱을 괴고 백일몽에 빠져들 찰라, 그가 말을 걸어왔다. 작달만한 키에 다부진 몸매, 전형적인 멕시칸이다. 곱슬머리 위에 비스듬히 눌러쓴 멕시코 전통모자 솜브렐라가 무척 잘 어울렸다. 자신을 후안이라고 소개한 그는 내 이름과 국적을 물었다.

“오! 꼬레아, 2002 월드컵, 부에노! 부에노!”

축구를 좋아한다는 그는 자국 리그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나 역시 얘기 상대가 그리웠던 터였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여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대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 내가 테이블에 놓인 고추를 집어 먹었다. 타코를 시킬 때 나왔던 곁들이 음식이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그가 물었다.

“맵지 않아? 신기하네. 우리 멕시칸만 매운 거 잘 먹는 줄 알았는데”

우스웠다. 청량고추에 길들여진 내게 멕시코 고추는 그저 파프리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고추장부터 시작해서 김치, 낙지볶음 등 나는 한국의 매운 음식을 열거하며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가 내기를 제한했다. 매운 고추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멕시코를 대표하는 술 데킬라를 사주자는 것. 방금 먹은 고추 수준이라면 한 바구니를 가져와도 문제없겠다 싶어 흔쾌히 응했다.

그가 종업원을 부르더니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종업원이 접시 가득 고추를 담아왔다. 모양새가 방금 전 먹은 고추와 사뭇 달랐다. 더 작고 더 두꺼웠다. 불안감이 밀려왔으나 이내 마음을 다 잡았다. 뭐 크게 다르겠나 싶었다.

그가 먼저 고추 하나를 집어먹더니 우물거린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내 차례다. 보란 듯이 고추 2개를 집어 삼켰다. 씹는 순간, 아차 싶었다. 뜨거운 기운이 입안에 감돌았다. 매웠다. 정말이지 죽을 만큼 매웠다. 청량고추보다 20배는 더 매웠다. 혀에 감각이 없다. 눈물이 핑 돈다. 당황하는 나를 보더니 그가 괜찮냐고 묻는다. 웃는 낯이다. 멀리서 종업원도 키득거린다.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엔 그가 고추 2개를 먹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거드름을 피운다. 고추 하나를 집었든 나는 선뜻 입에 가져가기 못하고 망설였다. 그가 웃는다. 조소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나는 두 눈 지그시 감고 고추를 씹었다. 아! 진짜 맵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따위 고추가 다 있담! 채소가 아니라 흉기다. 결국 나는 손을 들었다. 얼음물을 연거푸 들이켰지만, 불에 덴 듯 입안은 얼얼하기만 했다.

약속대로 그에게 데킬라를 사주었다. 속이 쓰렸다. 내기에서 졌기 때문인지, 매운 고추 때문인지 아무튼 무지하게 속 쓰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