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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어제도 한 장…오늘도 한 장…책 없이 독서를 한다

문득 사무치게 책이 그리웠다. 7개월 동안 활자를 접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단 깨달음을 향한 간절함이 더 컸다.

스스로 말하기 겸연쩍지만,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취미를 물어오면 주저 없이 책 읽기라고 답하곤 한다. 신에게 밉보여 끝없이 갈증을 느껴야 하는 그리스신화 속 '탄타로스'처럼 나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있다. 독서를 통해 책의 정수를 빨아들일 때면, 한 여름 논바닥처럼 갈라진 내면의 대지가 촉촉이 젖어 옴을 느낀다. 이런 희열 때문에 습관처럼 책을 읽었더랬다.

칼라파테에서 5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칠레령 토레스델파이네. 산은 늘 한 가득 깨달음을 안겨준다.



바다·산·빙하, 그 안에서의 깨달음
짜릿한 희열 안고 또 새로운 곳으로

입에 가시가 돋는 경지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어쨌든 반년이 넘도록 책과 결별한 내게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오가다 만나는 한국 여행객들에게 책을 구걸해 봤지만 허사였다. 어느 나라 건 서점은 있기 마련, 허나 매번 높다란 언어장벽에 막히기 일쑤였다. 무미건조한 가이드북을 몇 번씩 곱씹지만, 그럴수록 독서에 대한 향수만 짙어갔다.

파타고니아의 칼라파테는 이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준 고마운 도시다. 그곳에서 책을 구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올시다'다. 다만 나는 칼라파테에서 흔히들 말하는 책이란 텍스트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타고니아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녔다. 동서로 대서양과 태평양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고, 내부로는 깎아지른 기암절벽의 안데스 산맥, 광활한 팜파스 지형, 거울처럼 맑은 호수, 신비로운 빙하가 조화를 이룬다. 자연의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나는 파타고니아 중심부인 칼라파테에서 자연을 벗삼아 낚시를 하고 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처 저술되지 못한 수십 권의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곧 살아 숨 쉬는 생생한 독서였다.

칼라파테는 송어 낚시로 유명하다. 송어를 잡기 위해선 떡밥이나 지렁이 대신 루어라는 모형을 사용한다. 릴 낚시대에 송어를 자극할 만한 먹이 모양의 루어를 달고, 이를 수면을 향해 멀찌감치 던진다. 이후 줄을 감아 주면 루어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물속을 유영하며 딸려오는데, 송어가 이를 먹이로 착각하고 덥석 문다. 이때 줄을 감는 타이밍과 속도가 중요하다. 너무 늦게 감으면 수면 깊숙이 가라앉은 루어가 물풀이나 바위에 걸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줄을 끊어야 한다. 반대로 조급함에 빨리 감으면 송어가 루어를 발견하지 못해 허탕을 치게 된다.

칼라파테에서 송어를 낚던 호수다. 어디가 수면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호수는 맑고 깨끗하다.


루어가 적당한 위치에 침잠했을 때 알맞은 속도로 줄을 감아야 한다. 즉, 완급조절이 송어를 낚는 비결인 것이다. 생전 처음 루어낚시를 접해본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이를 터득했다.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돌이켜 보면 타이밍과 속도, 완급조절에 실패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쳤을까? '뭐든 때가 있다'는 진리를 무시한 채, 늑장을 부리는 동안 수많은 기회가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줄을 감아본들 소중한 가치들은 이미 수면 아래 있는 바위에 걸려 꿈적도 하지 않는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정신이 팔려 섣불리 행동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수두룩하다. 조급하게 줄을 감게 되면 송어는 절대 루어를 물지 않는 이치다. 안타깝게도 '깨달음'은 늘 '후회'보다 반 박자 늦게 찾아온다.

낚시 뿐 아니라 명산 토레스델파이네를 오르는 동안에도, 모레노 빙하를 탐방하는 동안에도 나는 독서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태초부터 천지간에 책이 없었던 적은 없다. 동틀 무렵 구름과 바다 사이를 살펴보면 언제나 수억만 권의 문자가 있었다"던 옛 성현의 말씀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책 속의 지식을 흡수하듯, 세계와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이 곧 독서란 얘기다.

나는 어제도 책을 읽었고, 오늘도 책을 읽는 중이며, 내일도 책을 읽을 것이다.

아름답고도 슬픈 사연을 가진 모레노 빙하는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지구별 단상]'아내, 그리고 남편' 빙하 속 시린 사연   
 
2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빙하를 찾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앉아 빙하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슬퍼 보여,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매일 여기서 뭘 하는 거요?"

그가 대답했다.

"아내를 기다린다오."

"당신 아내가 어디 있는데, 이렇게 빙하를 찾아오는 거요?"

남자는 손끝으로 빙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 아내는 저 빙하 속에 있소."

20년 전 아내와 함께 칼라파테로 신혼여행을 온 이 서양인의 운명은 가혹했다. 빙하 트레킹을 하던 도중 아내가 무너진 빙벽 사이로 떨어져 실종된 것이다. 그는 절규하며 아내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들은 그더러 포기하라고 했다. 철옹성 같은 빙하가 삼킨 이상, 시신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기다렸다. 고국에 두고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칼라파테에 머물며 20년을 한 결 같이 빙하를 찾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빙하 붕괴로 떨어져 나와 표류하던 유빙 속에서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꽁꽁 언 아내를 안은 채 그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칼라파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모레노 빙하가 시리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