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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마추픽추에서 가진자의 잔혹함을 보았다

성난 태양은 천지간 만물을 녹일 기세다. 머리 꼭대기에 똬리를 튼 볕 앞에 자외선 차단제 따윈 조소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나절이 못돼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이 돋더니, 생채기에 소금을 댄 듯 따끔거린다.

사람뿐이랴. 철옹성처럼 우뚝 선 건물도, 강철처럼 단단한 아스팔트 도로도 대자연의 공세에 무력하게 아지랑이 숨만 토해낸다.

무엇이 페루 하늘의 태양을 진노하게 만들었을까?

우루밤바 강을 따라 형성된 정글을 헤치고, 다시 한참 동안 험준한 산맥을 오르고서야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천연의 요새는 스페인의 파괴를 피해 그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다.


페루는 태양 신의 후손인 잉카족이 세운 나라다. 13세기 말 페루에서 제국의 초석을 다진 잉카인은 선진문명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을 통합해 갔다. 200년 동안 발전을 거듭한 끝에 잉카제국은 페루를 중심으로 지금의 에콰도르·아르헨티나·칠레에 이르는 너른 땅을 다스린다. 짧은 시간에 남미 최대의 문명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들은 제국 곳곳에 태양신을 섬기는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쳤다. 정성스레 쌓은 석조 건물에 태양 문양을 수놓고, 제단을 만들어 기도를 올렸다.

태양신은 화답했다. 따뜻한 볕을 선사하는가 하면, 때론 비구름 뒤로 물러나 시원한 빗줄기를 내렸다. 곡식은 풍부했고, 가축은 살이 올랐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제국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16세기 초반 한 무리의 이방인이 제국을 찾았다. 잉카인은 그들을 환대했다. 태양신의 후손들은 하얀 피부에 가려진 이방인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침략군은 그렇게 손쉽게 제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태양신을 섬기던 신전이 허물어지고, 성당이 지어졌다. 해체된 제단은 침략군 막사의 돌담으로 전락했다. 뒤늦게 제국을 지키려 봉기한 잉카인은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앞에 맥없이 스러져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태양신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잉카문명의 발상지 '티티카카' 호수에서, 최후의 보루 '마추픽추'에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나는 하나의 문명이 탄생하고, 발전하고 결국엔 한낱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잔혹한 인간사를 보고 있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푸노의 티티카카는 해발 4000m 상당에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다.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하늘과 맞닿은 이 호수에 태양신의 아들인 망코 카파크가 내려와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강림 전설'에 걸맞게 티티카카는 신비감이 짙게 깔린 호수였다. 하늘을 담은 호수 위에는 갈대의 일종인 토토라로 만든 인공섬이 점점이 떠있다.

잉카 전설에 따라 태양신의 아들이 내려왔다는 푸노의 티티카카 호수. 갈대로 만든 집과 배가 인상적이다.


갈대를 꺾어 만든 보금자리에서 잉카의 후예들은 물결을 따라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와 호수 위를 거닐던 태양신의 아들 망코 카파크를 보는 듯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하늘 호수'는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한없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고 쿠스코로 향했다. 잉카 문명의 정수로 꼽히는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서였다.

'늙은 봉우리'란 뜻의 마추픽추는 '공중도시' 혹은 '잃어버린 도시'로 불린다. 쿠스코에서 우루밤바 강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 정글지대. 이곳에서 다시 험한 산맥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마추픽추가 자리하고 있다.

표고 2400m의 마추픽추는 잉카문명이 끝을 맞고 400년이 지난 1911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잉카 최후의 도시답게 첩첩산중에 꼭꼭 숨겨진 도시는 스페인의 야만적인 파괴를 피해 오롯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차와 버스, 도보로 이어진 힘든 여정 끝에 마추픽추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동은 쉬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찼다. 험한 정글을 헤치고 1만 명을 수용할 만큼 거대한 규모의 도시를 건설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칼 한 자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진 건축물은 가히 잉카문명의 정수라 불릴 만했다.

페루에서 나는 잉카문명의 '시작'과 '끝'을 보았다. 단순히 '보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 명치끝이 아려왔다. 여정 8개월 동안 힘의 논리에 스러져간 문명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탓이다.

아시아의 티베탄과 위구르족이, 오세아니아의 어보리진과 마오리족이, 북·중미의 마야문명과 아스텍문명이 그랬다. 그리고 남미의 잉카문명까지.

우위를 점한 자들의 논리는 판에 박은 듯 똑같다. 그들은 언제나 파괴와 살육의 이유로 문명의 미개함을 든다.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제멋대로 상대 문명을 재단한 후 개화라는 미명 아래 수백 년간 이어온 소중한 문화유산을 짓밟는다. 잔혹한 파시즘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패권주의의 망령은 지금도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스러져간 문명을 보며 그저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생각 한 편에 자리한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도무지 지워지질 않는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돼 지키자고. 강자의 지배 논리에 맞서 공존과 평화의 원리를 지키고, 자본의 논리에 맞서 인간의 논리를 지키자고."

과연 우리는 숲이 돼 지킬 수 있을까? 깜냥이 부족한 여행자에겐 참으로 어려운 담론이다.


[지구별 단상]내 머리가 하늘에 닿았을까?

티티카카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호수다. 해발 4000m의 고지대에 자리한 만큼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조차 하기 힘들다.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이 코앞에 있다. 손을 뻗으면 이내 닿을 듯이 가깝다. 갈대로 만든 배를 타고 유유자적 호수 위를 떠돌자니 엉뚱한 상상이 든다.

'이대로 펄쩍 뛰면 머리가 하늘에 닿지나 않을까? 정수리를 쿵하고 찧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지. 까짓것 뛰어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