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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여행길에서 나의 편견과 이중잣대를 생각하다

오늘은 엽서를 띄웁니다. 문득 엽서가 쓰고 싶어졌어요. 카파도키아는 그런 곳입니다. 풍경 하나하나가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지난밤에 이스탄불에서 밤차를 탔습니다. 많이 피곤했는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잠이 들었죠.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먼발치서 동이 터 오릅니다. 비몽사몽간에 짐을 꾸려 내렸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변 풍경이 몹시도 생경합니다.

황량한 벌판에 기암석이 삐죽삐죽 솟아 있습니다. 사방이 모두 그렇습니다. 혹성에 온 기분입니다. 우주선 비유에스(BUS) 호는 소행성 카파도키아에 저만 덩그러니 남겨두고서 지구 은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카파도키아는 한 마디로 규정짓기 힘든 풍경을 지녔다. 외롭고 황량한 듯 보이지만 기암 군락의 어우러짐은 왠지 모를 따스함을 품고 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통칭합니다. 제가 도착한 곳은 괴레메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먼 옛날 화산활동으로 이 지역에 셀 수 없이 많은 응회암이 생겨났습니다. 켜켜이 쌓인 화산재가 굳어져 돌덩이가 됐고, 비바람이 이를 깎아 다양한 모양의 기암석 군락을 만든 거죠. '자연이 빚어낸 수작'이란 찬사가 아깝지 않습니다.

며칠 사이 눈이 많이 왔습니다. 숙소를 나서기 전 단단히 채비를 해야 합니다. 밑동 잘린 나무에서 굵은 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고, 운동화에 짚단을 엮습니다. 이 정도면 눈 쌓인 둔덕도 끄떡 없겠다싶어 혹성탐사를 시작합니다.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동안 오르니, 괴레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너른 공간에 돌무더기가 빽빽합니다. 딱히 뭐라 규정하기 힘든 풍경입니다. 고요한가하면 돌 사이를 헤집는 바람의 울음이 적막을 깹니다. 외로운가하면 눈 덮인 기암 위로 새가 날아들어 친구가 됩니다. 삭막한가하면 사이좋게 어우러진 기암 군락이 온기를 전합니다.

비바람이 깎아 놓은 기암석은 그 모양이 다채롭다. 그 중 낙타를 빼다 박은 암석이 눈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앉아 솟아오른 돌덩이 하나하나를 관찰합니다. 그 크기와 모양이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어떤 놈은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어떤 건 제 키 만 하기도 합니다. 버섯 모양의 돌도 있고, 솜사탕같이 생긴 놈도 있습니다. 그 중 한 녀석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낙타모양의 암석입니다. 사람 손으로 빚어도 저리 만들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타를 빼다 박았습니다.

낙타바위를 보니, 중국에서 낙타를 탄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막 여행을 시작했을 때였죠.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중국 둔황의 사막에서였습니다. 11개월이 흘러 전 터키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터키는 실크로드가 끝나는 곳입니다. 역사의 현장, 그 '시작'과 '끝'을 모두 경험하고 나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게 마련입니다. '시작'과 '끝'을 떠올리자, 지난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처음 길을 나서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또 채우겠다고. 대한민국 울타리 안에서 굳어진 타 문화·인종에 대한 선입견, 시장논리에 길들여진 배금주의, 소수자·약자를 향한 차별…, 이런 것들을 남김없이 비우고, 그 자리에 좋은 것들만 채워오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카파도키아는 화산이 빚어낸 기암석 군락으로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은하계를 표류하다가 이름 모를 혹성에 떨어진 기분이 든다.


초심을 돌아보니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우리 돈 몇 백 원 때문에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별거 아닌 일에 '이
러니 너희 나라가 못사는 거야'하는 조롱과 멸시를 퍼부은 적이 많습니다.

접근하는 모든 이를 잠재적 도둑으로 의심하는가 하면, 구걸하는 아이를 매몰차게 내쫓기도 했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선 공연히 주눅이 들고,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곤 합니다.

서구를 여행하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을 느낄 때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정작 개발도상국 사람들에 대한 저의 편견엔 눈을 감습니다. 자신을 향한 불편부당함과 남을 향해 스스로가 행한 그것에 '이중 잣대'를 들이댑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석양에 길게 끌린 제 그림자가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상념에 빠진 채 둔덕 아래 기암석의 풍경을 봅니다. 그리고 다시금 제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오랜 세월 쌓인 화산재가 응회암을 만들었듯, 제 마음속에도 버려야 할 것들이 견고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카파도키아 기암석은 비바람이 깎고 다듬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자리한 편견과 차별, 옹졸함은 무엇으로 닳아 없어지게 해야 할까요?

남은 여정 동안 제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