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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365일 두시간만에 여행이 끝났습니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지난해 4월 14일 오후 2시 홍콩행 비행기를 탔더랬지요. 이달 14일 오후 4시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으니, 정확히 365일하고 2시간이 흘러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365일은 공전 주기라지요. 태양 둘레를 한 바퀴 돌던 지구를 따라 저 역시 그 '푸른 별' 안에서 공전을 한 셈입니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미, 중남미, 유럽, 아프리카 순으로 6대륙, 30개국, 135개 도시에서 발품을 팔았습니다.

아프리카 남아공의 한 초원에서.


여행이 끝났습니다. 일상생활 틈틈이 저는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침에 눈 뜰 때 푹신한 침대와 상쾌한 향의 이불이 낯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혼자라는 사실이 마냥 신기합니다.

주머니 사정 상 여행 내내 예닐곱 명이 함께 생활하는 값싼 기숙사형 숙소에서 자야했습니다. 아마 거기에 길들여진 탓이겠죠.

끼니때도 마찬가집니다. 김치 한 접시로도 밥을 거뜬히 비웁니다. 빵 조각으로 연명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성찬입니다. 허리춤을 옭아매던 '복대'(귀중품 보관을 위해 바지 안에 차도록 만들어진 지갑)도, 자물쇠를 채운 무거운 배낭도 필요 없습니다. 더는 길 위에서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속으로 되뇝니다. '아! 진짜 여행이 끝났구나. 여긴 한국이구나'하고 말입니다.

세상에 눈뜨려 6대륙 30개국 135개 도시서 발품
여행은 채우고 비우는 과정…좋은 기억만 남아


여행이 끝났습니다. 마냥 좋을 줄 알았습니다. 여행 말미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렸기에 더욱 그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흔 시간 동안 꼬박 기차를 탄 후 지독하게 몸살을 앓았던 중국에서, 피 같은 여행경비를 사기당한 인도에서, 발톱이 빠져 죽을 거 같이 아픈 채로 올라섰던 히말라야에서, 한밤중 숙소를 찾아 낯선 골목을 헤매던 콜롬비아에서, 뜨겁고 건조한 모래바람에 숨 쉬기조차 버거웠던 중동의 사막에서, 먹을거리가 없어 주린 배를 부여잡아야 했던 쿠바에서, 밤새 모기에 뜯긴 채 혹여나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던 아프리카 초원에서, 저는 늘 집 생각을 했습니다.

멋쩍고 객쩍은 고백이지만 10kg이 빠져 수척해진 모습을 거울 속에서 마주하고는 펑펑 운 적도 있습니다. 약비나도록 여행했으니 당분간은 꼼짝 안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돌아온 지 열흘 만에 좀이 쑤십니다. 떠나 간 곳에서는 제자리를 그리더니, 이제는 제자리에서 떠나갔던 곳을 그리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짙게 밴 이 역마살을 어찌하리오.

아프리카 나미비아 모래언덕 듄45에서.


여행이 끝났습니다. 끝나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엇을 보고 배우느라 그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했느냐고. 질문 앞에서 번번이 말문이 막힙니다.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단숨에 토해내기에 벅찹니다. 어쩌면 혼란스러워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십 수 년 동안 3자로부터 주입돼 제 속에서 굳어진 것들이 당사자 앞에서 무너져 내리길 반복했으니까요.

제 눈은 보았습니다. 서구사관에 익숙한 탓에 편견 일색이던 이슬람국가를 '달리' 보았습니다. 식민지배의 아픔이 남아있는 개발도상국의 현실을 '바로' 보았습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정체성을 지키려 투쟁하는 소수민족을 '아프게' 보았습니다. 어디 이뿐일까요. 역사는 참으로 약자에게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제 스스로에게 물을 차례입니다. 저는 무엇을 얻었을까요.

여행 떠나기 전 다짐했었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비우고, 또 채워오겠다고. 내 안에 쌓인 낡고 묵은 것들을 버리고, 그 자리에 참신한 가치들을 담아 오겠다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부끄러워 낯빛이 빨개집니다. 깜냥 부족한 저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여행만 다녀오면 시야가 탁 트이고, 대번에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다행입니다. 제가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 지를 깨달았으니까요. 살면서 청산해야 할 빚이자,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아시아 네팔 히말라야에서.



남미 볼리비아 소금사막


여행이 끝났습니다. 아닙니다.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세계일주보다 훨씬 길고 긴 인생 여정이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인생 여정에서 느낄 고단함은 지난 1년 동안 길 위에서 감내해야 했던 그것보다 훨씬 클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세계일주를 끝낸 지금 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좋은 기억만 가득합니다. 힘들었던 순간조차 술자리 안줏거리로 거듭납니다. 인생여정도 다르지 않겠지요.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후에 웃으며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겠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날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날이 올 테죠.


여행이 끝났습니다.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장도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독자여러분의 응원과 질책이 힘이 됐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기꺼이 지면을 허락한 <경남도민일보> 덕에 여행을 좀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 함께 여행했던 동지들, 한국에서 안위를 걱정해준 친구들, 선·후배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가족들,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행이 끝났습니다. 아닙니다.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세계일주보다 훨씬 길고 긴 인생 여정이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인생 여정에서 느낄 고단함은 지난 1년 동안 길 위에서 감내해야 했던 그것보다 훨씬 클지 모릅니다.  -윤유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