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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단조로운 유럽보다 모로코의 혼잡함이 좋다

"어이! 후세인, 진짜 반갑다. 나 또 길을 잃었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시장 골목이 이쪽이던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안면을 튼 그다. 수년지기 대하 듯 호들갑을 떨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상관이랴. 거미줄처럼 복잡한 메디나 골목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을.

체면도 차릴 때와 버릴 때를 알아야 한다. 그의 싸늘한 시선에 아랑 곳 없이, 계속 친한 척을 했다.

"꼬레아! 시장은 저쪽이라고. 나 지금 일해야 하니까 알아서 찾아."

손수레에 잡동사니를 늘어놓던 후세인이 퉁을 놓는다.

그럴 만도 하다. 두 시간 전, 미로 속을 헤매다가 행상하던 그에게 도움을 청했더랬다. 바쁜 와중에 그는 약도까지 그려가며 성의껏 길을 일러 주었다. 그런 호의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결국 나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페스의 메디나에는 수 백 갈래의 골목길이 나있다. 좁은 길 사이로 행상과 행인이 뒤섞인 메디나는 항상 북적거리고 활기차다.


발을 디딘 지 닷새가 넘었건만, 모로코 페스의 뒷골목은 마냥 낯설기만 하다. 페스는 수 천 년 전 조성된 아랍의 전통주거지로 유명한 도시다. '메디나'로 불리는 이 주거지는 지역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 특히 꼬인 실타래처럼 어지러이 펼쳐진 메디나의 골목길은 '이색 풍경'을 쫓는 전 세계 배낭족의 역마살을 자극한다.

메디나는 수백 갈래의 좁은 길을 품고 있다. 규칙이나 기준을 거부한 채 제 멋대로 뻗은 골목길 앞에서 방향감각 따윈 의미가 없다. 영화 <큐브>의 움직이는 미로처럼 메디나는 좀체 목적지를 내주지 않는다.

복잡하기로 이름 난 까닭에 많은 이들이 나름의 채비 끝에 메디나를 찾는다. 현지 안내원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고, 지도나 안내책자를 구입하기도 한다. 굴지의 여행사에서 내놓는 메디나 관련 상품도 많다. 모로코에 도착하기 전까지 골목길의 존재조차 몰랐던 나에게 시련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모로코는 원래 예정에 없던 여행지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중 뜬금없이 모로코 행을 결정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는 유로화의 부담과 혹독한 추위를 피하고 싶었다. 유럽 물가의 절반 수준으로 지중해 이남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모로코가 단연 매력적일 수밖에.

모로코 전통의상을 입은 노인.

하지만 이는 부차적 이유에 달하지 않는다. 모로코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유럽 여행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교통, 통신, 숙박 등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관광인프라, 호객행위는 고사하고 뭘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개인주의, 유럽의 이런 요소들이 처음엔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자 편안함은 곧 지루함으로 변했다. 매너리즘에 빠져들 시기, 새로운 자극이 절실했다.

모로코는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로 스페인과 마주하고 있다. 스페인의 항구도시 알헤시라스에서 배로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당긴 김에 쇠뿔을 뽑기로 마음먹은 나는 곧장 모로코 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는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다. 이베리아 반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 유럽의 영향 또한 강하게 받았다.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배 하에 놓인 전력도 있다.

아랍과 아프리카, 유럽 등 각기 다른 문명이 녹아든 모로코의 문화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무뎌진 여행자의 촉수에 날이 섰고, 다시금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온종일 메디나의 미로 속에서 발품을 팔아야 할망정, 나는 유럽의 단조로움보다 모로코의 혼잡함이 좋다. 때 이른 소소리바람을 맞으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자면, 눈과 귀가 무료할 새 없다. 히잡과 차도르를 걸친 여인네, 때마다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코란의 읊조림,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이'가 입었던 모로코 전통복장 등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하나같이 생경하고 흥미롭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건 '찻집 문화'다. 메디나에는 차를 파는 곳이 많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남정네들이 허브 차나 커피를 홀짝이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도 금주를 권하는 이슬람교의 특성 상 이런 문화가 생겨난 듯하다.

유흥문화에 익숙한 내게 남자끼리 차 마시며 수다 떠는 모습이 영 낯설다. 찻집 한 귀퉁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허브 차를 시켰다. 오지랖 넓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모로코인,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예상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들어온 것조차 모른다. 모두들 찻집 천장에 매달린 TV에 빠져있다.

아랍의 전통주거지답게 페스의 메디나는 중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가죽으로 유명한 모로코인 만큼 페스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죽염색공장이 있다.


아랍방송은 아비규환의 가자지구를 비추고 있었다. 장면 장면이 섬뜩해 현기증이 일었다. 백린탄 파편에 살이 타들어간 노인과 흰 천에 둘둘 말린 아이의 시체를 보도하던 앵커의 목소리가 격앙된다. 찻집 안이 술렁인다.

속보는 끝났지만,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원성은 잦아들지 않는다. 그들은 둘러앉아 한참 동안 토론을 벌였다. 낯선 아랍어 사이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USA, UN 등 귀에 익은 단어가 들린다.

문득 나 혼자만 길을 잃고 헤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 인권, 도덕, 이성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 역시 방향을 상실한 채 가자지구의 뒷골목을 표류하고 있는 듯하다.

한낱 여행자야 발품 팔면 그만이라지만, 대의야 어디 그런가. 보편적 가치가 제 길을 찾지 못하는 동안 무고한 희생만 늘어가는 것을.

단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갈 요량으로 서둘러 찻집을 나왔다. 성벽 사이로 퍼져가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질녘의 여유였다.